본문 바로가기

신학과 성경자료

거룩하신 하나님

반응형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날 우리는 광고주가 상업적인 문구로 사람들을 철저히 길들이는 시대에 산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온갖 종류의 짧고 간결한 광고 문구를 통해 삶의 신비를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현대적인 방식이다. 우리는 오늘도 상당한 희생을 감수하고서 진통제, 만병통치약, 치료제 등을 공급받는다. 온갖 약품, 화학제품, 기획물이 신문, 방송, 거리, 가정, 자동차 범퍼에서 판매된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다룰 내용은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가져온 혼란이 아니다. 이런 혼란이 초래한 직접적인 부작용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 맥과이어의 이름과 나란히 붙어 있을 때 느끼는 어려움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그런 어려움이 발생하는 더 큰 구조인 현대 세계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계는 지난 세기 또는 그 이전 시기부터 발생한 혁명적인 변화들의 결과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은 전통적인 혁명의 성과가 아니다. 지금까지 발생한 것은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다.

 

우연한 혁명

보편적으로 혁명은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로 말미암아 기존 체제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혁명은 권력자에게 권력을 제거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최고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해 사회를 보전하려는 자 등이 바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격한 숨소리를 느끼는 자들이다. 혁명가들이 승리를 쟁취하면 한때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리게 되나, 권력의 신성한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 지위와 실용성을 박탈당하고 냉담하게 방치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이런 식으로 문명과 정치 질서를 바꾸어 놓는다. 이것이 혁명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현재 서구 사회에 발생하고 있다.

 

서구 문화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행복을 제공해 왔다. 서구 사회는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변해 왔다. 이 변화는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도 아니요, 기술적인 요인만큼 중요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변화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영적' 이다. 비단 우리 삶의 외부 구조만 아니라 내면의 자아도 이 변화의 공격을 받아 왔다. 이 변화는 가치가 형성되고 욕망이 일어나고 기대가 발생하고 의미가 구성되는 자리인 우리 존재의 중심에 예상치 못한 영향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모든 혁명과 달리, 이 우연한 혁명은 자의식적인 이데올로기나 혁명가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혁명을 주도하는 사람은 실제로 보통 사람들인데, 대부분은 스스로가 혁명적인 변화의 선동가와 대리자로 일하고 있음을 깨닫는 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대단히 온화한 혁명가이지만, 그 모든 특징에도 불구하고 이전 세대가 여기던 가치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

 

판에 박힌 세계 문화

현대화와 현대성 이 두 개념 모두 오늘날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현대화는 삶의 외부 구조를 변화시키고, 현대성은 현대화된 세계 환경에 등장하는 가치와 의미(현 상황에서 대체로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게 보이는 가치와 의미)를 변화시킨다.

현대화 과정은 주로 자본주의, 기술, 도시화, 정보통신이라는 중요한 네 가지 실재에 따라 이루어진다.

 

1. 자본주의

과거의 중세적인 통합이 붕괴됨에 따라 유럽에 결정적인 영향력으로 등장했으나, 19세기 초 산업화가 진행될 때까지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으며, 기술이 보편화되고 자본주의의 기능에 반드시 필요한 일부로 자리 잡게 되면서 꽃피우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들였고 고도의 조세, 금융, 법률, 정보통신, 교통 제도를 확립해 왔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외양은 물로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 생활 장소, 일을 경험하는 방식 등에 영향을 주었고, 사회 영역에 적응하고 성공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가치와 기대마저 변모시키고 있다.

 

2. 기술

현대 자본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의 사람들은 자연주의 따라 생각하고 삶의 모든 것을 이해관계(가장 효율적인 것이 가장 윤리적이라고 믿는 태도)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다.

 

3. 도시화

현대화는 또한 급속한 도시화에 힘입어 진행 중인데, 도시화는 서구 사회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도시는 자체적인 고유 영역을 가질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긴밀히 접촉하기 때문에, 독특한 심리 환경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다문화 환경은 세속적인 세계적인 세계주의, 다원주의, 상호관용,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고 고유한 생활방식으로 돌아가며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개인 영역 등을 위한 강력한 요구를 일으켜 왔다.

 

4. 정보통신

마지막으로 오늘날 첨단 정보통신은 우리를 지구촌의 일원으로 만든다. TV는 우리를 전 세계 사람들과 연결시킴으로써 물리적·문화적인 거리에 대한 심리적인 초월성을 제공한다.

또한 TV는 구체적인 상황, 완전히 동질적인 정보, 일시적인 유행, 대중문화의 시끄러운 음악 등과 결합된 요소와 대대적인 상호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TV는 그처럼 많은 정보를 순식간에 쏟아 내기 때문에, 어떤 가치도 쉽게 소진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날 현대화는 역사, 종교, 체제 등이 완전히 다른 국가들이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요구하고 생존하게 만든다. 문화는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특정한 곳에 국한될 수 없다. 그리고 문화의 빈약함은 삶을 진부함(똑같은 패스트푸드, 똑같은 음악, 똑같은 청바지와 티셔츠, 똑같은 영화, 똑같은 소비 욕구 똑같은 뉴스 등으로 어디서나 제공되는 똑같은 진부함)으로 격하한다. 그리고 그 문화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문화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하찮은 일반인이 되는데, 그들은 대단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생활하지만 어떤 특징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의 '노숙자'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다윈주의의 요구대로 삶을 공공 영역과 개인 영역으로 분리시키는 특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드물다. 우리는 가정, 친구 혹은 형편에 따라 이웃과의 사적인 세계에서 직업적·비인격적 관계로 쉽게 옮겨 갈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기능적인 측면(의사, 배관공, 회계사 등)으로 사람들을 이해한다. 주변 사람들이 맡은 직무에 따라 성실히 우리를 돕는다면, 그들이 착하거나 나쁘다는 사실은 아무런 차이를 발생 시키지 않는다. 익명성이 커질수록 책임감은 줄어든다.

신은 한 개인의 영혼에 자리 잡고 그의 사사로운 직관 속에 침잠되어 있을 수 있으나, 상업과 대인 관계에서 차지할 자리는 전혀 없다. 기계화된 세계, 급속히 성장하고 다양하게 분화된 도시는 사실상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관심을 인정하지 않고 은혜를 찾지 않고 용서도 구하지 않는 사회적인 특징을 보인다.

 

비용과 이윤

복지와 행복의 관계, 번영이라는 외부 환경과 민족이라는 내면 인식의 관계가 분리된 것이 오늘날 현대 세계가 보여 주는 가장 큰 기현상임에 분명하다. 현대화된 세계가 우리에게 수많은 유익을 준 것은 틀림없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고 한때 꿈처럼 여기던 자유를 손에 넣었을 뿐 아니라, 권리를 신장하고 교육의 기회를 넓히고 더 큰 소망을 북돋우고 풍요를 누려 왔다. 하지만 현대화는 환경과 사회에서 우리를 격리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더 큰 불안을 느끼도록 만들고, 직장에 대한 만족감을 현저히 감소시켜 삶을 각박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화는 가정을 붕괴시키고, 아이들에게서 순수함을 빼앗고, 윤리적인 가치를 희석시키고,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미국인이 돈과 여가를 가지고 부세대가 꿈꾸던 많은 일을 하고 윤택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을 점점 불만족스럽게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화가 강요한 인간 영혼의 고갈이 그런 경제적인 풍요로 상쇄되거나 보상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날 우리는 상대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그런 풍요를 축적한 바로 그 수단(현대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세계의 재편)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만들었다.

 

중심의 소멸

현대 세계는 지나치게 많은 경쟁적인 흥밋거리와 가치와 우상과 종교와 세계관 등으로 가득하고 너무 많은 활동과 책임과 선택의 자유가 범람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 세대가 소유했던 의미와 조화는 시장의 무질서한 소란과 모든 감각을 끊임없이 엄습하는 공격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나님, 초자연적인 현상, 도덕적인 절대 개념 등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적이고 세속화된 세계에서 낯선 대상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데 중요성을 부여하고 공공장소에서 얘기하던 세상이 그렇지 않은 세상으로 변화된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첫 단계로, 하나님이 사회의 인식에서 사라지기 시작하고 떠들썩한 인간의 열망만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다. 둘째 단계로, 완전히 인간적인 열망이 대신 자리하게 되면서 현대화가 세계에 풀어놓은, 놀랄 만큼 파급 효과가 크고 비인격적인 힘이 삶을 이루는 중심을 차지한다.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노예로 전략한다. 이 세계는 현대성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 힘은 우리가 창안했으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를 주인의 자리에서 쫓아냄으로써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나님을 세계에서 추방시킨 태초의 혼란을 재연한다. 결국 우리도 이런 변화를 통해 자신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오늘날에는 실제로 착한 것보다 착하게 보이는 것을 더 중시한다. 외양이 실체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실체는 쉽게 자취를 감춘다. 이제 우리 속에 남은 것은 공허함뿐이다. 심리적인 토양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 신앙이 기독교적인 것만큼 현대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신앙은 어떻게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신앙은 어떻게 다른 것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고지식하게도 현대화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질문들은 대다수 사람에게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현대 세계와 거리감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돈키호테처럼 망각하고 그들을 비난한다. 복잡한 현대 생활의 길을 걸을 때, 우리의 신앙은 우리와 동행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신앙에 유연성(이렇게 각자의 언어와 상징으로 서로 다른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현대 생활을 이루는 무수한 세계를 가로질러 뻗어 가기에 충분한 유연성)이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지난 20세기에 나타난 개신교계 내분의 격동을 살펴본 후 성공의 시기도 많았으나, 문화 내부에 상당한 결점을 노출한 고질적인 혼란도 있었다. 현대적이면서도 기독교인다운 태도를 취하려는 노력이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들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20세기에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현대적이면서도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 곧 맥과이어와 예수님을 연결하려는 노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음주의 내부에 발생한 일들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