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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초기 중생, 연속 중생관_벌코프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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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코프 조직신학에서 정리한 초기 중생, 연속 중생관


 

▲  루이스 벌코프 Louis Berkhof

 

일단 존머레이의 중생관은 나중에 다루기로하고 질문중에 연속적중생관의 낯섬과 초기중생도 마찬가지. 그리고 초기중생과 회심사이의 시간적순서와 벌코프가 초기중생과 회심사이에 있는 자들에 설득해야 함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청교도들이 초기 중생과 회심의 과정에서 초기 중생을 경험한 자들에게 설교자들이 그들을 회심으로 이끌도록 설교나 그 밖의 외적 방편을 통해 설득해야된다고 말하는 것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라는 말씀은 영혼의 의사 책을 참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결국은 벌코프도 중생을 과정이다 라고 본 것과 중생은 회심으로 끝난다라고 본 것을 살펴보죠. 그리고 용어의 정의가 서로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면 될것같습니다.(벌코프는 초기중생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개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음)

 

루이스 벌코프로 부터 시작하지요

중생에서는 두가지 요소, 즉 새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 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절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그의 책 조직신학 p714)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새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생각할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초기 중생정도로 보면되겠죠)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p716)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나타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는 인식될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 변화는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후에 있어서도 인간은 단지 그결과로서만 이를 인식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인이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회의와 불확실성과 투쟁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점진적으로 이것들을 극복할수 있고 확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p718)- 박지현 형제님의 의문에 답변이 된 것같습니다.(중생,효과적부르심,회심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의문)

 

중생의 정의- 현재 사용되는 중생에 관한 상기 진술로 부터 중생을 두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을 새 생명의 원소가 인간에게 심겨지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이 거룩하게 되는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 할수 있다. 하지만 "재발생"의 개념뿐 아니라 새 출생의 개념을 포함하기 위해서 본 정의에 "이러한 새로운 성향의 최초의 거룩한 활동이

확보되어 있다" 라는 문장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p718)-초기중생과 새출생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의미함.

 

내적 부르심에서 하나님의 영은 설교 말씀을 통해 도덕적 설득의 방식으로만 역사하며, 그 설득을 효과적이 되게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도록한다. 이는 오성과 의지에게 말하는 말씀의 본질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설득이 내적 부르심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여기에 말씀을 심령에 적용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첨가되어야 한다.

(벌코프는 이후 회심 부분에서 회심은 내적(효과적)부르심의 직접적 결과이다. 안간에게 주는 영향으로서 내적부르심과 회심의 발단은 실제로는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면 자연적인 논리적 결과로 위에서 중생과 회심에서 시간적인 차이가 인정된다면 중생과 회심(내적부르심결과)사이에 말씀의 방편으로 설득할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웨스트민스터 고백에서는 동일시,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함)

엄격한 의미에서 즉 재발생으로서의 중생은 인간의 잠재의식에서 발생(초기중생으로 보면 되겠죠)하며, 인간이 이에 대해 취할수 있는 어떠한 태도와도 독립되어 있다. 반면 부르심은 의식을 대상으로 하며 의식생활의 일정한 성향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중생은 안으로 부터 역사한다면 부르심은 밖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중생은 창조적이며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으로, 이로써 인간은 다른 상태로의 전이, 즉 영적인 사망의 상태에서 영적인 생명의 상태로 옮겨지게 된다. 반면 효과적인 부르심은 목적론적이며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 내며 하나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는 새로운 성향이 발현되게 하며 새생명을 활동하게 한다. (p720)-파란색글은 중생의 결과로 보면 되겠죠(새출생)-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중생과 효과적인 부르심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함.

 

부르심과 중생의 관련순서(순서에 유의 하여 보십시오.) 우리가 다음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1) 논리적으로 볼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2)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심어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초기중생으로 보면되겠죠)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3)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 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효과적 부르심이다.

4) 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 안에 탄생된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 한다. 새 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중생의 결과로보면 되겠죠

 

이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벌코프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시간적순서가 있다는 말인데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임)

 

벌코프는 계속해서 예를 들기 시작함.

유아에 대해 예를 들고, 다음엔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가운데 생활하며 그 들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 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모태신앙도 아니고 교회에서 말씀을 듣지 못한자)들은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 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급진적인 회심을 말함.

벌코프는 급진적인 회심의 경우는 시간적순서를 가지고 이해하지 말라고 함 (동시발생)

 

벨기에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도르트신조 미국 개혁교회가 받아들인 유트레히트의 결론등을 참조했다.

이러한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신앙고백들이 중생을 새 생명의 기원과 회심에서의 발현을 포함하는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신앙이 죄인을 중생시킨다는 조문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생의 사역에 도구적이라고 말하는 듯한 구절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 신앙고백서들은 이들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하여 새 생명의 원소가 주입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모호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유트레히트의 결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번째 항목 즉 직접적 중생에 대해서 본 대회는 이 표현이 루터교인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해 중생이 말씀이나 성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전능하신 중생사역에 의해 야기 된다고 우리교회들이 항상고백하는 한에 있어서 광범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령의 사역은 이러한 의미에서 말씀의 설교와 마치 별개의 것처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고백서에는 복음설교를 듣지 못한 영아기에 사망한 어린이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어떤 표준적 신앙고백서에서도 중생이 이런 어린이 혹은 저런 어린이들에게 일어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성인의 경우에는 성령의 중생 사역이 복음 설교에 동반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회심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죄를 회피할 뿐만 아니라 새사람을 입고 거룩함을 위해 노력하는 의식적출발점을 표시한다. 중생에서 옛생활의 죄악된 원리는 새 생명의 거룩한원리로 대체된다.

하지만 회심에서만 이러한 전이가 의식에 침투하여 이를 새로운 방향 즉 하나님으로의 방향으로 변화시킨다. 죄인은 의식적으로 이전의 죄악된 생활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헌신된 생활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는 옛것과 새것의 투쟁이 단번에 종식된다는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이러한 투쟁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은 회심에 있어서 직접적, 초자연적 방식으로 역사하기도 한다. 중생한 인간에게 주입된 생명의 원소는 자신의 내재적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하고 열매를 맺게하는 영향력을 통해서만 자각적행동을 나타낸다.

중생시 심겨진 새 생명은 죄인이 회심할 때 그의 의식 영역에 적극적으로 표출하게 된다. 중생시 잠재의식에서 야기된 변화가 회심에서는 의식으로 침투하게 된다. 유아기에 중생한 자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양자가 동시에 일어나게 된다.

중생시 죄인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회심에 있어서는 수동적이기도하고 능동적이기도 하다. 전자는 결코 반복될 수 없으나, 후자는 어느정도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은 한 번만 일어난다.

 

-벌코프 조직신학 에서 인용 정리함


벌코프 조직신학 합본

저자
루이스 벌코프 지음
출판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2001-04-10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벌코프의 대표적인 저서 조직신학을 번역한 책. 조직신학 전반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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