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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 민간인들의 국제 침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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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간인들의 국제 침략사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넘보고 있다. 1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기업인, 문화인 심지어는 기자에 이르기까지 민간인들이 그 앞장을 서고 있다. 1세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 특히 조선 침략에서 이른바 낭인이라는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1895년 민비시해(을미사변)를 자행한 깡패집단쯤으로 알려진 이 낭인들이야말로 일본 제국주의의 맨 앞에 서서 일본정부와 적극적인 유대를 가지면서 정부의 외교정책과 해외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민간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변호사, 언론인, 종교인 등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서양의 침략에 선교사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낭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낭인들은 명치유신을 일으켰다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사무라이 출신들로 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아시아국가들이 서양의 침략과 모욕을 막기 위해 한마음으로 협력해야 함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판단하여 일본 이외에는 지도자가 될 능력을 소유한 국가가 아시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사명감`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낭인들은 급진적 보수나 일신의 안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하기 곤란한 일들을 도맡았고 특히 대외침략을 일삼는 군부는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결성하여 조선침략의 `선교사` 노릇을 한 우치다 료헤이의 활동을 중심으로 낭인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료헤이는 대외 팽창주의자들의 모임은 현양사에서 활약하던 사무라이 출신의 낭인이다. 현양사는 명치정부의 대외정책이 미온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동, 노일전쟁을 도발시킨 단체이다. 현양사 활동을 통해 그는 일본이 대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을 확보하는 것이 선행조건이라고 판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다. 그 계기는 1894년 조선에서 터진 동학 운동이었다.

 

이 때 이미 조선에는 많은 수의 낭인들이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1892년 부산에 외교관 출신인 야마자 엔지로를 중심으로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조선의 정세에 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다. 동학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그 동안 모아놓은 정보를 가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현양사의 낭인들은 1893년 일본을 지지하던 김옥균이 청나라 땅에서 암살되자 외무대신에게 청나라와의 개전을 요구하며 전쟁 여론을 부추겼다. 이 때 외무대신은 이 요구를 겉으로는 거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침략주의자인 육군참모총장 가외카미 소로쿠와 이들을 연결시켜 주었다. 민간인과 정부의 교묘한 역할분담

이 행해진 것이다.

 

정부와 군부의 내면적인 비호에 고무된 낭인들은 동학혁명을 기회로 행동에 들어갔다. 정부의 개진 결단을 돕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을 질러야 한다는 `방화의 역할`을 하기 위해 천우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천우협의 격문에서 `시주음락으로 소일하는 한국정부와 민씨 일족의 압정을 깨뜨려 도탄에 빠진 조선백성을 구제`하고 `민씨의 악정을 뒤에서 조종하고 지원하는 청국을 한반도에서

쫓아낼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천우협은 18946월 하순 부산에 도착한 후 전국에서 석 달 동안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게릴라 활동과 폭력을 감행했다. 우치다 료헤이는 그 행동대원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내정에 큰 소요를 야기했다. 이들은 의도대로 청일전쟁을 점화시키는 데 성공하고 전쟁 중에는 일본군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첫 해외활동의 대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료헤이는 한국, 중국에 대한 공작을 구상했다. 그러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청일전쟁의 전리품인 요동반도의 반환을 협박하는 이른바 삼국간섭이 일어나자 료헤이는 러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온 일본신문들이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고 있을 때 정부 관리도 군부 인사도 아닌, 일개 민간인에 불과한 료헤이는 `먼저 러시아의 내정을 연

구하여 복수의 길을 얻기 위해` 단독으로 시베리아로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에 유도 도장을 열어 거점을 마련했다. 여기에도 역시 대륙 낭인들이 이미 진출해 있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톡의 시가, 요새, 주요 도로들의 지도를 만들고 정보 활동을 하는 군첩보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자신의 부하들을 한국, ,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간도에 보내 일대를 조사하게 했다.

 

이어 러시아의 수도인 페테르스부르크에 가서 일본의 해군무관, 외교관 등의 도움을 받아 가며 정보 수집에 열을 올렸다. 3년 만에 귀국한 료헤이는 이미 `치가 부패하고 인륜이 타락한 러시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동아시아 보전이라는 국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단호히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전쟁이 일어난다면 `승리의 여신은 일본 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

 

귀국한 후 그는 순회강연을 통해 러시아와의 개전 여론을 일으키는 한편 흑룡회라는 낭인들의 강력한 조직을 결성, 정부나 군부보다 더욱 호전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흑룡회의 구성원에는 사업가, 변호사, 언론인, 군인, 교사, 유도사범, 승려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한국, 중국, 시베리아, 몽고, 동남아시아 등지에 나가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이 조종할 수 있는 현지의 정치세력을 포섭하는 공작을 벌여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의 일원이 되어 통역관 또는 첩보원으로 그들의 `사명`을 수행했다.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는 이들 단체의 주장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은밀히 이들 단체에 자금을 조달하고 호전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의 주장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외교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민간인의 은밀한 대외활동, 그리고 이들과 정부와의 교묘한 결합 등 1세기 전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애용한 방법은 지금도 한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지에서

기업인, 언론인, 유학생 등을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다.

 

 - 상식 밖의 세계사에서 발췌

 

 


상식 밖의 세계사

저자
안효상 지음
출판사
새길 | 1998 출간
카테고리
상식 밖의 세계사
책소개
-
가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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