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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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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

 

흔히 장개석과 모택동의 싸움을 2000년 전에 있었던 항우-유방의 싸움과 비교 하곤 한다. 유방은 일개 농민의 아들로 병사 한 명 창 한 자루도 없는 맨손이었다. 그는 주변의 친구, 동지 들에게는 신의로, 백성에게는 관대함으로 급속히 인심을 얻어 갔다. 이에 비해 항우는 초나라라고 하는 강대국의 최고 귀족 집안의 자제로, 유방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초패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병사를 혹독하게 다루었고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있었. 결국 항우는 유방의 군사가 사면에 불러 대는 초나라 노래를 들으며 회한에 찬 최후를 맞게 된다.

 

중국에서 국민 혁명이 시작된 이래 장개석과 모택동,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은 항우와 유방에 비유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장개석은 북벌 전쟁을 통해 군벌을 타도하고 통일 정권을 수립한 국민당의 당, 군권 등을 한몸에 장악하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가히 유일한 중국의 지배자였다.

 

장개석이 1927년 상해에서 피비린내 나는 공산당 숙청(4.12쿠데타)을 자행했음에도 그가 곧 이어 국민당 최초의 통일 정권인 남경 정권을 수립했을때 민중의 지지는 열광적이었다. 오랜 통치에 지친 사람들은 국민당의 통일 정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사실 장개석이 집권한 1927년부터 일본군이 침입한 1937년까지 남경 정부의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과 그 성과는 대단한 것이었다. 1928년 최초의 국립은행이 설립되고 이금제(한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부과되는 내지 관세)폐지되어 국내 시장의 통일이 진전되었다. 1931년부터 34년까지는 세계 공황의 여파와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시달리고 있는 농촌을 구제하기 위해 농촌건설을 전개, 공산당의 소비에트에 맞대응했. 이를 바탕으로 1930년대 중반에는 전국경제위원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업화를 추진했다. 1935년에는 종전의 냥을 원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고 아편 전쟁 당시 빼앗겼던 관세 자주권을 열강으로부터 되찾음으로써 중국 민족의 숙원을 풀었다.

 

 

 

 

정치척으로도 잔여 군벌들을 아우르고 공산당을 오지인 연안으로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자신감에 찬 장개석 정권은 손문의 국가건설 단계인 군정-훈정-헌정 중 최종단계인 헌정 실시를 약속하고 1935년 헌법을 기초했다.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민당 정부가 반제반봉건의 노선으로 매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인 1947년 공산군과 내전을 벌이고 있는 국민당은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몰라볼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고 내전을 시작한 지 3년도 안 되어 대륙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우선, 장개석의 독재적 성향이다. 그는 북벌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을 동원하기 위해 당내 이들을 위한 조직을 설치하고 지원했다. 그러나 북벌이 끝나고 자신이 통일 정권의 지배자가 되자 이 조직들을 폐지하고 민중운동을 폭력으로 탄압했다. 학생이나 지식인의 움직임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들이 손문의 유지와 장개석의 약속대로 헌정의 실시, 의회 소집을 요구하자 장개석은 헌법 초안을 만든다는 구실로 시간을 끌었고 점차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당내 좌파가 끊임없이 독재 체제의 완화를 촉구했지만 장개석은 정치란 엘리트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수의 군부 인사와 당료들의 의견만을 들었다. 이에 따라 국민당은 대중의 힘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그가 버린 대중은 공산당 쪽으로 향해 갔다. 이 점에서 모택동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초창기의 혁명성과 활력을 잃고 부패하고 노쇠하기 시작 했다.

 

둘째, 남경 정부의 도약기에 엄습한 일본의 침략은 치명적이었다. 전쟁의 첫해에 국부군은 그 때까지 10년 동안 이룩한 인원과 장비의 대부분을 파괴당했다. 그 후로 국부군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국민당 정권이 피난 간 서부의 오지인 중경은 당시로서는 거의 외국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낯선 곳이었고 낙후한 지역이었다. 서부 중국은 전국 전력의 4%을 생산했고 공장수의 6%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거의 농업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낯선 국민당 사람들에게 비협조적이었다. 중경에 있을 때 국민당 정부의 수입은 63%나 감소했다. 정부의 적자 재정에서 비롯된 인플레는 7개월 동251%나 물가가 오를 정도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학생과 지식인 들은 장개석에 대해 전민 항전, 즉 노동자, 농민, 학생 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지 말고 이들 대중의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것만이 대일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방안으로서 장개석이 약속했으나 실행하지 않고 있던 의회의 개설을 촉구했다. 요컨대 정권의 민주화만이 전쟁 능력을 제고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의 지지를 받은 이 주장에 대해 장개석은 전쟁은 정부와 군대가 한다며 코웃음을 쳤다. 반면 공산당은 이들의 주장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과정을 그치면서 많은 지식인과 학생, 사회 저명인사들이 국민당의 독선에 염증을 느끼고 공산당 쪽에 가까워져 갔다. 게다가 장개석은 이들이 빨갱이라며 탄압하여 결과적으로 공산당을 도와 주었다.

 

1945년 소련의 만주 진공도 장개석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소련은 국민당 정부가 만주에서 군사적, 행정적인 힘을 확보하는 것을 저지시키려고 만주의 공업시설들을 떼어 갔다. 그리고 이곳에 공산군의 근거지를 마련해 주었다. 풍부한 식량과 일본인이 남겨 놓은 공업시설을 갖고 있는 만주를 장개석이 확보했다면 그리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당 약체화의 또 다른 원인은 중앙 정권에 대한 지방 세력의 저항을 들 수 있다. 1940년대 말까지 군벌 세력은 완전히 소탕되지 않았고 중앙정부는 마을단위까지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 거듭되는 패전과 살인적인 인플레로 위기에 직면한 장개석 정권은 1948년 통화 개혁을 단행한다. 장개석의 아들이자 후일 자유중국의 총통이 되는 장경국이 주도한 이 개혁은 법폐라는 옛돈을 금원권이라는 새 돈으로 300만 대 1의 비율로 바꾸고 동시에 모든 물가와 임금을 동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통화 개혁7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국민당 정부는 붕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절망한 장개석은 19481월 이렇게 내뱉었다. 솔직히 말해 중국에서나 외국에서나 오늘날의 국민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혁명 정당이란 있어 본 일이 없다. 얼이 빠져 있고 기율이 없으며 더 나아가 옳고 그른 기준도 없다. 이 따위 당은 오래 전에 부서져 쓸어 버려야 했다.” 그러나 당의 기율을 세우고 옳고 그른 기준을 바로 하라는 수많은 충고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것은 장개석 자신이었다.

 

- 상식 밖의 세계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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