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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청교도 구원에 있어서 준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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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구원에 있어서 준비론 


 

 

 

청교도들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신령한 진리로 동의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신령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동의를 의미합니다. 믿으라고 초청받고 요구를 받는 자들은 이러한 죄인들입니다. 구주께서는 복음가운데 자신을 필요로하는 모든자들에게 자유로이 제공되십니다.

모든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방법이 죄로 인한 회오와 겸손의 예비적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회오, 곧 죄의식, 죄의오염, 추악성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에 대한 지식과 회오가 믿음에 선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떠한 죄로부터 구원이 필요한지 알기까지 죄에서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청교도의 믿음을 위한 '준비'입니다.

예비적역사가 필요한 이유는 단지 타락한 인간이 선천적으로 죄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죄를 증오하고 죄로 부터 해방되기를 열망하게 되기 전에 구주로서의 그리스도께 전심을 다하여 다가온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 믿음을 위한 준비는 사실상 유일하게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종종 그리스도께로 나아감을 제한하는 것으로 오해되었습니다.

 

패커의 청교도사상에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스펄젼은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청교도 시대의 몇몇 설교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 많은 과오를 저질렀다. 얼라인과 박스터... 데드햄의 로저스, 건전한 신자의 쉐퍼드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자격들에 대한 책을 쓴 미국인 토마스 후커, 이 출중한 사람들은 그들이 분별있는 죄인들이라고 칭한 자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회개와 죄에 대한 증오를 신자가 그리스도께 의뢰하는 근거로 설교했다. 그들에 의하면 죄인은 "나는 죄에 대해 여차여차한 정도의 감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를 신뢰할 자격이 있다." 고 추론을 내려도 괜찮은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러한 추론이 치명적인 오류가 혼합된다고 확인하는 바이다.....

 

분명히 스펄젼이 지칭한 저자들은 이 예비적 단계들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그들의 기술을 세 가지 사항들을 고려하여 정확하게 평해볼수 있다.

 

첫째로 그들은 삽입적인 부정들에도 불구하고 죄에 대해 인간들의 교만을 꺾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모든 세부적 과정에 있어 동일한 노선을 일정 불변하게 따르므로 만일 사람이 이 모든것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은혜의 이방인들이 분명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박스터는 십대에 많은 공포와 비탄을 경험했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를 고찰할 때 "후커씨와 로저스씨와 그 밖의 신학자들이 묘사하는 방법으로 그의 심령에 대한 성령의 역사들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심령을 똑같이 깨뜨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경험적 신앙의 이 거인들이 만든 거북스러운 경전의 겉옷을 벗어버렸다.

 

둘째로 후커와 쉐퍼드는 죄인이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정죄를 받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것이 죄에 대한 참된 겸손의 표적이라고 가르침으로 성경의 범위를 넘어갔다. 백스터 그리고 후에 길레스허민은 사람이 정죄받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요구된 것도 아니고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비평했다.

 

셋째로 이 저자들은 이 은혜의 예비적 사역에 관심을 집중하여 이것이 철저하게 행해져야 할 필요성을 반복하여 말함으로 구원을 찾는 영혼들이 절망 가운데 그리스도께 바로 나아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해하였다. 굳윈은 말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만일 지금 회심한 여러분이 우리의 어린시절에 살았다면 우리가 죄를 인하여 굴욕받는 세례요한의 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이 방해는 당연히 많은 병적 상태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믿음의 근거에 대한 질문에 있어 이 저자들은 비평을 받지 않는다. 그들이 이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정확하게 스펄젼의 교리와 같다. 즉 믿음의 근거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며 믿음은 복음을 듣는 모든 자에게 요구된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회오가 있음으로 자신이 그 죄로 부터 구원을 받기를 갈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죄의 형벌 뿐만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 부터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진실하게 전심으로 나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패커는 계속해서

복음의 믿음과 회개로의 부름이 사람에게 행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설교자와 상담자들은 이 본질적인 준비과정을 간단하게 하지 않고 죄인이 진실로 죄에 대한 사랑을 버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까지 계속 그의 양심에 그의 죄악성과 단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거룩함으로 인도되어야 할 깊은 필요성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지혜로운 설교자와 상담자들은 그에게 구주를 지적해 줄것이다.

청교도들은 이것이 회심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명령하는 목회 절차라고 말했다. 그들의 생각에 불안한 사람이 아직 자신의 죄악의 특성들을 직시하지 못했고 모든 죄악된 방법들을 버리기를 확실한 생각으로 바라는 시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자신의 죄에 대해 근심하는 것을 멈추고 즉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거룩하게 되라고 말해 주는 것은 가장 나쁜 조언이었다.

마음이 죄에서 떨어지기 전에 이런 조언을 하는 것은 거짓평안과 거짓 소망권유, 복음의 위선자들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조언은 기독교 상담자가 해야 하는 마지막 일이다.

그러나 준비 과정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주권이 인정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묘사되어진 노선을 따른 준비없이 성인들을 회심시키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 공식 내에는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심령을 똑같이 깨뜨리시지 않으신다. 굳윈이 말한대로 어떤 회심은 모든 점에 있어 돌발적이다. 그 준비는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 반면에 어떤 회심은 번연의 경우처럼 길게 끄는 사건으로 구도자가 그리스도와 평화를 찾기까지 여러해가 경과한다. 얼마나 오래 걸리고 얼마나 격렬하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아무런 법칙도 제시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만큼 빨리 진행되나 그보다 더 빠르지는 않다. 따라서 조언자의 역할은 산파의 역할이다. 곧 그의 임무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각 단계에서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출생 과정이 얼마나 빠를지 미리 예언할 수 없고 물론 사전에 조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계속해서 제가 앞에서 말한 연속적인 중생관이 준비사역에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필요충분조건임을 살펴보면 되겠습니다. 순간적인 중생관은 중생이 순간적으로 단번에 이루어진다는 견해로 회심자가 회심 경험의 초기단계에서 눈깜짝할 사이에 전적으로 중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되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추구하거나 분투하는 것이 필요 없고 어떤 설득도 필요없게 됩니다.

어느날 하나님 말씀을 듣고 갑작스럽게 그리고 전폭적으로 회심을 하게 되면 그 결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순간적 중생관은 중생을 완전한 쇄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죄인을 완전히 회심한 사람으로 바꿔주는 변화가 일순간에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회개와 믿음은 의식적인 회심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열매가 됩니다.

 

존머레이 교수님은 이견해를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전을 지불하고 우리를 핏값으로 사셨을때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은사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모든 은사들을 받게됩니다. (칭의,성화 양자 중생 믿음 등등) 그것은 분리될수 없는 한 사건이면 동시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논리적인 순서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순간적 완전한 중생이라는 개념은 두가지 방식으로 설교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먼저설교자들은 죄인들을 설득하고 호소하여 구원을 추구하도록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만약 청중들이 중생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청중들이 중생한 사람이라면 이미 온전히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호소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단지 율법들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을 씻어 주고, 하나님이 죄인을 거듭하게 해 주시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설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순간적중생의 입장에서는 죄인이 이미 중생했기 때문에 회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출생이 회개와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칼빈과 많은 청교도 개혁주의 자들은 연속적인 중생관을 가졌습니다. 칼빈은 중생이나 새로운 출생을 다소 넓은 의미로 사용했고, 그 용어를 사람이 새로워지는 전체 과정을 나타내는 매우 포괄적인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새로운 생명을 출발케하는 신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회심 즉 회개와 믿음과 성화까지도 포함시켰습니다.

 

연속적 중생관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은 보통 두개의 주된요소로 구분합니다.

벌코프는 그것을 재출생과 새출생. 발생, 혹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 그리고 출산혹은 해산함 이라고 해서 둘사이의 유사점을 구별함. 다른말로하면 처음에 영적인 생명이 심겨진다고 해서 완전한 영적깨달음과 모든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기의 중생은 일반적으로 순간적인 것이며, 이후에 출산과정이 따라옵니다.

 

벌코프의 묘사에 의하면

중생의 처음 단계는 의식할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은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단계를 통해 죽었던 죄인이 생명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되어 자발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일이고 죄인은 수동적입니다.

하지만 전체 회심의 과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초기 중생이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함에따라 회심자는 지적이고 의식적으로 설득되어 자신의 죄를 완전히 깨닫고 회개와 믿음에 이릅니다. 이모든일이 일어났을 때에만 중생의 환전한 축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벌코프는 두번째 단계를 새로운 생명이 그 은밀한 깊은 곳에 숨어있다가 드디어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때 라고 부릅니다.

 

이런 연속적인 중생의 입장을 견지하는 칼빈주의 저자들은 중생은 회심으로 끝난다 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중생은 일종의 과정입니다. 초기중생이 혜성의 머리와 같다면, 혜성의 꼬리는 회심에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초기중생은 회심의 모든측면들을 한 순간에 드러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회심의 모든것에 이르게 됩니다.

 

요약하면 연속적인 중생은 영적인 생명이 심겨지는 초기단계가 있어야 진리에 대하여 마음을 열수 있고 죄에 대한 확신을 수용하며, 자발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됩니다. 하지만 그 초기단계에서는 새로운 출생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단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한 사람은 계속이어지는 회심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적으로 깨달으면서 통과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뒤따르는 과정이 초기의 중생과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훨씬 더 길게 지속되는 투쟁의 기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몇분이 될수도 있고, 몇시간, 몇주 혹은 몇달이 걸리기도 합니다. 이기간에는 비록 그가 초기중생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이관점에 따르자면 어디까지나 그는 구도자입니다.

 

존오웬 토마스 굿인, 플라벨등 대륙의 수많은 개혁주의자들이 이 견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윌리엄퍼킨스도 그의 저서에서 이 중생관을 말합니다. 이것이 퍼킨스의 황금사슬입니다. 골든체인입니다. 이 중생관을 가질때만 설교는 설득적이며, 간청하며, 권면할수 있는것입니다.

 

-이글은 영혼의 의사 피터마스터스의 책에서 인용하며 요약정리했습니다. 이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부분 동감하시고 왜 설교자의 전도설교가 반드시 필요한지 절감하게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청교도들이 말한 준비사역은 구원순서의 정립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구원론의 중생관과 직결되게 됩니다. "중생은 회심으로 끝난다. 곧, 중생은 일종의 과정이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연속적인 중생관입니다. 중생은 시작단계에서부터 새생명이 의식적으로 발현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의 회심의 전과정을 의미하기도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회심에 대한 묘사는 수태에서 시작해서 한생명이 세상에 태아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출생의 사건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 초기중생을 수태라고 부르기로 하면 회심의 전과정은

 

1.영적수태: 초기중생

2.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동시사건

3.회개와 믿음:동시사건

4.칭의와 의식적인 새 출생:동시사건

5.확신

 

1. 수태(초기중생)은 전체 회심과정의 첫 단계이다.

하나님은 수태단계에서 영혼 속에 매우 값진 생명의 씨앗을 뿌림. 수태는 짧은 순간에 일어남.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발생. 수태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영적필요에 대하여 각성하게 되고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함.

오직 수태가 되어야 이런 경험을 할수 있음. 수태는 지성, 감정, 의지등 영혼의 모든 영역에 구석구석 영향을 미침.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시작. 살아나게 해 주는 것 이것을 수태라고 함.

 

2.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

수태가 일어나면 반역적이던 사람이 즉각적으로 자신이 잃어버린자로써 곤경에 처해 있음을 각성하게 되고 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는 동시 경험을 하게 됨. 수태의 첫번째 효과는 죄인이 깨어나서 자신의 영적상황을 보는 것. 각성은 죄인의 무감각을 깨뜨리는 것. 필요에 대한 깊은 열망. 공허감이 생기도록 해줌. 영적인 것들에 예민해짐. 하나님의 거룩 그리고 영원한 일들이 실재함에 대해서도 지각. 죄인은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발견.

일단 수태가 발생하고 난 뒤에는 구원의 과정이 계속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점차적으로 더 강하게 그를 사로잡게 됨. 그는 더이상 전처럼 자신을 신뢰하지 않음 왜냐하면 편견과 불신앙이 물러가고 이제는 갈보리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의 내면을 움직이기 때문임.

 

이런 변화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외적수단이 바로 설교, 개인 전도등과 같은 매개체들임.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임. 이 들음은 수태를 통해 사람내면 가운데에 역사하실때에야 비로소 효력발생. 수태는 순간적인 것이지만, 수태의 결과로서 경험되는 각성은 오랜 기간 계속 깊어짐. 성령께서 설교, 상담, 독서 같은 외적 매개물들을 계속 사용하셔서 죄인의 영혼속에 복음의 진리가 깨달아지도록 하시기 때문.

죄에대한 확신은 죄의식과 불결함에 대한 의식을 주어 죄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함. 성경의 여러회심사례들을 보면,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은 한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날 수도 있음. 순간적이건 점진적이건 주님께서 죄에 대한 확신을 심화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외적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복음전도임. 설교자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되는 가장 우선되고도 중요한 특권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논증은 불신자들의 깊은 필요와 죄의 심각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래서 수태의 경험을 통해 다음 단계로 들어가게 해야 함. 일단 참된 진리를 추구하던 사람이 진정으로 각성되고 죄에 대한 확신에 이르게 되면, 회개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감.

 

3. 회개와 믿음

구원에 이르는 경험의 세번째 단계에 있는 동시사건 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주님께서 마음안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시고, 그 결과로 각성하게 하시고 죄를 깨닫고 확신하게 하시는 목적은, 그사람을 자유롭고 자발적인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임.

성령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 기쁘고 자발적으로 주께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과정을 시작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우리가 우리 삶에서 취하게 되는 진정한 자유의지에 기초한 최초의 도덕적 결단이 됩니다.

회개란, 개인의 실제적인 죄에 대해 사무치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며, 반역적인 삶에서 벗어나 주님의 권위와 통치 아래 항복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처음에는 완전히 신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연기시키는 결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구도자들은 회심을 의식적으로 깨닫기 전, 수많은 시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번째 단계는 거듭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복음 전체에 대한 신앙,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신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은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구도자의 신실함을 더 견고케 해 주시 위해 전도설교라는 매개체를 이 단계에서 사용합니다. 그 결과 그는 꺼리낌없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4. 회심의 4단계: 칭의와 새 출생

신실한 회개와 믿음의 직접적인 결과는 구원의 네번째 단계인 칭의와 의식적인 새 출생이라는 동시 사건인데 이것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남. 물론 전체 모든과정이 새로운 출생의 과정임. 하지만 여기서는 출생의 의식적인 단계를 의미함. 수태(초기중생)를 통해 임신을 하게되고 때가 되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의식적인 새 출생은 생명이 시작된바로 그 시작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며 가시적인 생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이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새로운 본성을 받게 되고 상당한 정도로 확신 하게 됨.

칭의가 하늘에서 선포될 때, 회심한 사람은 이를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새로워졌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표를 가지게 됨.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의 표지와 새로운 성품을 드러나게 됨.

 

5. 새로운 회심자는 자기가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볼수 있습니다.

 

구원의 5단계중에서 3단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 수태는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입니다. 네번째 단계인 칭의와 의식적이며 가시적인 새 생명이 주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순간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나 첫번째와 네번째 단계 사이의 두번째, 세번째 단계는 지속적일 수도 있습니다. 각성과 죄에 대한 확신의 경험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표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계속적으로 권면하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이 사람의 영혼 속에 수태를 일으키시며, 구도자들은 영적으로 각성하고 죄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됩니다. 복음의 논증과 간청 그리고 강청은 외적인 도구입니다.

설교자가 복음을 전할때 마다 그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죄인은 설교자와 전도자들에게서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고, 주님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넘어질때마다 설교자와 전도자의 권면과 강청으로 다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게 됩니다. 최종적으로 구도자가 분명히 새로워지고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자신에 삶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그리하여 구도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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