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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프린스톤 신학_Princeton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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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톤 신학_Princeton Theology

 

 

 

 

 

프린스톤 신학은 두드러지게 미국적이며,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19세기 표현이다. 만일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 프린스톤 신학을 단순히 어거스틴적 칼빈주의의 재판 또는 단순히 미국 문화의 산물로 간주한다면 프린스톤 신학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함부로 기술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들은 문화의 주체자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지켰고, 칼빈주의를 정확한 미국의 억양으로 말하였다. 당대의 대부분의 다른 지성인들과 같이 그들은 진리에 대해 보편실재론적 접근을 하였고, 과학적 탐구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또한 대륙으로부터 밀려오는 고등비평에 회의를 제기하였고, 경제적 및 정치적 자립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 논문은 당시의 상황에서 신학자들, 그들의 신앙(확신), 신학교를 설명하려는데 있다.

 

 

 신학자들

 

1812년 뉴저지 프린스톤에 프리스톤 장로교 신학교가 설립되고부터 1929년 신학교가 개편될 때 까지 프리스톤의 신학 형성에 공헌한 인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세 명의 신학자는 초대 교수 아치발드 알렉산더와 그의 제자 찰스 핫지, 핫지의 제자 벤자민 워필드 등이다.

알렉산더(1772-1851)는 부흥 운동 지도자, 목회자, 교육가, 신학자로서의 충분한 경력을 쌓은 후 1812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 부임하였다.

1789년대와 1790년대에 그는 고향 버지니아에서 전도하면서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목회 초창기에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 특별히 그의 의지에 관한 논문을 열심히 읽었다. 그는 목회의 경험과 함든-시드니 대학의 학장 경험을 쌓은 후 프리스톤에 왔을 때는 오랫동안 프린스톤을 특징지었던 지성적인 원천과 실천적인 관심을 전수하여 줄 수 있었다.

핫지는 알렉산더가 세워 놓은 신학적 골격을 주석, 대중 강연, 교단사, 조직신학, 신학지의 논문들을 통하여 발전시켰다. 그는 프린스톤 전통에 있었던 어떤 인물보다도 개혁주의 유산, 미국 문화, 목회적 관심으로부터 더 많은 요소들을 빌려 오는데 성공하였다.

후임자 워필드는 알렉산더나 핫지 당시와는 다른 형태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는 역사적 기독교의 현대적 변형의 오류를 반대하여 수백 개의 논문과 수천 개의 서평을 썼다. 그의 지성은 식별력이 있었으며, 그의 가슴은 역사적 칼빈주의에 충실했다.

이들 외에도 프린스톤 신학자들 중에는 알렉산더의 아들들인 제임스 알렉산더, 조셉 알렉산더와 리만 아트워터, 윌리엄 그린, 그레샴 메이첸이 있다.

 

 확신들

 

프린스톤 신학은 그들의 신학을 찬성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들이 획일화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 프린스톤은 그 이전의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연속성이 있는 개혁주의 입장을 유지하여 왔으나 그 이전의 개혁주의 전임자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의 노고를 단순히 전수하거나 똑같은 관련성을 강조한 것만은 아니었다. 프린스톤의 장점과 단점은 프린스톤 학파의 가장 중요한 그들의 신앙을 조사하면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1) 개혁파 고백주의

비록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다양한 개혁파 전통 전반에서 똑같이 끌어온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신앙을 체계화하는 일에 있어서는 풍부한 칼빈주의 유산을 자유스럽게 이용하였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구원론에 관하여 어거스틴, 칼빈, 몇몇의 중요한 청교도들, 루터와 전통주의 루터파 신학자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다양하게 인용한 것은 그들의 개혁주의 신앙의 폭이 좁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하여 준다.

 

2)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존중하였다. 성경의 본질에 관한 프린스톤의 가르침은 연속성이 있었고 매우 명백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며, 성경은 역사적으로 연구될 수 있는 인간의 활동의 참된 산물이다. 성경은 또한 가장 완벽한 진리의 제시이며, 인간 저자들은 성령의 영감 아래 그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변증학에서의 성경의 위치, 좀 더 일반적인 교회의 삶에서의 성경의 위치, 자연계시(과학)와 관련한 성경해석에 관한 문제들에 대한 프린스톤인들의 증거는 통일성이 부족한 편이었다.

 

3) 스코틀랜드 보편철학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이 프린스톤 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 이미 오래 전부터 인식되어 오다가, 1955년 시드니 알스트롬이 이 주제에 관한 논문을 출판함으로 그 사실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프린스톤 개혁주의 확신에 이 18세기 철학적 입장이 첨가되면서 그 결과는 항상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의식의 전달을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직관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칼빈주의는 반대 방향을 지적하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철학적 충심은 때때로 과학적 실증주의자들과 비슷한 인상을 남겨 놓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보편실재론에 대한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영향은 완전하지도 않았고 충분히 이해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받은 보편철학의 영향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완전히 재구성하는 데까지는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그들의 풍부한 전통적 개혁주의 신앙에다 보편실재론 철학을 첨가시킨 것이다.

 

4) 종교적 경험, 성령의 사역

스콜라주의자들 또는 합리주의자들이라는 그들의 평판에도 불구하고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종교 경험의 중요성과 성령의 역사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처럼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항상 성령은 '거룩한 수단'을 통해 역사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종교적 경험과 성령의 역사가 그들의 신학과 어울리는가 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에 관한 그들의 진지함이 문제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런 열정이 전체적인 그들의 신학과 병합되었는지 하는 것이다.

 

 

 

 

 기관들

 

프린스톤 신학이 계속 중요시되는 주된 이유는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확신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그런 신앙을 포용하고 있는 기관들도 거의 교리만큼이나 인상적이다.

 

1) 신학교

대학원 신학 교육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미국 학교였던 프린스톤 신학교는 프린스톤 신학이, 아주 자연스럽게, 제도적으로 충실히 표현되었던 장소였다.

미국이 전례 없는 문화적인 위기를 겪고 있던 시대적인 상황에 응전하기 위해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된 것은 앤도버 신학교가 설립된 후 5년이 지난 1812년의 일이다. 학교 설립자들의 설립 목표는 문화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알맞은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것과 미국을 휩쓸고 있는 반종교적인 물결을 퇴치하는 것,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기독교를, 구체적으로는 성경을 학적으로 변호하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데 있었다. 학교의 보수적인 성격은 프린스톤 신학이 살아 있는 동안 변함없었다.

 

2) 서적

프린스톤 신학은 신학교 졸업생들과, 심지어 눈에 띄게 출판서적을 통해 퍼져 나갔다. 방대한 주제에 관한 논문들, 주석류, 서평, 팜플렛들이 대중에게 인쇄되어 이 신학을 보급시켰다.

 

3) 신학 잡지

프린스톤 신학은 신학 잡지에서도 상당히 표현되었다. 그들의 실력 있고 광의적인 서평은 프린스톤의 입장에 대한 충실한 해석, 라이벌에 대한 매우 엄격한 응전, 위대한 국가적 사건들과 지성사적 이정표에 대한 가장 사려 깊은 반영을 포함하고 있다.

이 신학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찰스 핫지의 Biblical Repertory와 Princeton Review이다. 이러한 신학지들이 영향력 있도록 만든 것은 지방적인 신학 논쟁을 완전한 개혁주의로 변호함으로써 세인의 관심을 확대시킨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능력에 있었다.

 

4) 장로교회

비록 신학교는 교단 전체에 프린스톤의 자신감을 심어 주지는 못했지만 그 영향력은 대한한 것이었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1837년 분리한 후 구파의 신학 전통을 철저히 지켰고 1867년 연합의 구실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에는 교단의 정책인 신앙고백의 개정과 신학적 포괄성을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일반적으로 교단을 고백주의적 칼빈주의 뿌리에 근접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9세기의 상황

 

프린스톤 신학을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한다면 프린스톤 신학의 참된 공헌은 명백하여질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프린스톤 신학의 상당한 부분이 당대의 보편적인 확신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즉시 보여줄 것이다. 예를 들면

 

1) 프린스톤 신학자들 대부분은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이 철학이 19세기 미국의 보편적인 지성 신조였기 때문이다. 보편철학의 전제들은 후에 미국 신학자들 가운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게 신학적인 의견 속에 보편화되었다.

2)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변호하였는데 이것은 19세기 대부분 거의 모든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이것을 당연히 여겼기 때문이다.

3)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신학의 구성에 있어서 순수한 경험주의를 옹호하였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미국 지성인들은 이와 같이 이론-구성식으로 접근하였기 때문이다.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노고에 관한 놀라운 일은 그들의 사상을 당대의 미국 지성적인 관습에 적응하도록 조정하였지만 역사적 칼빈주의에 상당히 충실하였다는 사실이다.

 

 

 

 관점: 프린스톤, 조나단 에드워즈, 화란 개혁주의자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업적뿐만 아니라 결점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다른 개혁주의 대변자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가장 적합한 두 사람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후예들이다.

이들 셋은 다른 지리적 장소, 윤리적인 기원들, 그리고 매우 다른 기질을 소유하였지만 그들 모두는 신학을 하는 노력과 칼빈주의 방식에서의 삶의 접근 등 상당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요한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1) 에드워즈와 화란 개혁파는 프린스톤 신학자들보다는 지적인 신학 체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2) 셋은 성경에 관한 그들의 접근이 사회에 대한 기독교 과업을 설계하는 데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달랐다.

프린스톤은 성경을 교리를 세우는 데 사용하였으며, 에드워즈에게 성경은 경건을 위한 원천이며, 심령을 은혜롭게 회심시키는 거룩하고 초자연적인 빛을 발견하기 위한 원천이었다. 화란 개혁주의는 교육, 정치학, 자원기관, 경제학이나 문화 형성을 위해 성경적인 원리들을 찾으려는 그들의 능력에 의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립하여 나갔다.

3) 셋은 미국에 적응하는 그들의 능력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천재성과 경건의 결합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의 칼빈주의는 그의 사후에도 오랫동안 살아 있었고, 화란 칼빈주의는 미국에서 더 지속되었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렀다. 이와 반대로 프린스톤 신학은 일관성과 영향력 모두가 있음이 입증되었다.

 

에드워즈, 화란 개혁주의, 구프린스톤은 각기 신학적인 위기들에 직면하여, 좀 다른 대응 방법을 선택하였고, 이들 선택들이 각 학파에 독특한 특성을 제공하였다.

 

 

 

 오늘날의 프린스톤 신학

 

구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저술이 꾸준하게 재판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압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계속하여 비판적인 집중을 받고 있는 것은 20세기 말에 개혁주의 미국인들과 복음주의 미국인들 가운데 이 학파가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린스톤을 구성하던 관심과 제도들의 특별한 혼합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의외의 일은 아니다. 오늘날 구프린스톤의 신학자들의 방법의 전제에 기초하여 어거스틴-칼빈주의, 경험론적 실재론, 실증주의 변증학, 그리고 경건을 결합하는 이들은 여기저기 산재하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이들 신학이 영향력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대변하였고, 자력구원과 자기계시의 인간적인 가면을 반대하였으며, 인간의 도덕적인 약점을 선포하고, 구원의 완성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변호하는데 챔피언이었다. 이것들은 만일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현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구프린스톤의 선물이 되었을 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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