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최덕성(고려신학대학원 역사신학 교수)
이 논문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2001년 8월 25일,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발표한 것이다. 『역사논총』에 실릴 예정이며, 필자의 근간예정인 『일제말기의 한국교회: 그 교회론적 성격』(잠정적 제목)에 수록될 예정이다. 미출간 논문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교회론적 성격"의 일부이다. 관련된 주제는 졸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본문과현장사이, 2000)의 제32장(477-494)에서도 다루고 있다.
한국교회사가 민경배 교수는 일제치하의 수진(守眞)성도들인 한상동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신사참배거부 운동을 주도한 사람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두 사람이 당시 한국교회에 대한 각각 다른 인식, 특히 상이한 교회론을 가졌다는 것이다. 주기철은 철저한 교회론자이며, 한상동과 주기철이 모두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했고 신사참배를 반대했지만, 전자는 분리주의적 교회관을 가졌고, 후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개정판), 6-7, 257-258.
민경배의 주장은 다른 교회사가들에게 의해서도 주창되고 있다. 이상규, 주기철 목사의 신사참배와 저항, 『기독교사상연구』 4 (고신대학교, 1997), 229-230; 제1회 소양 주기철 목사 기념강좌, 연세대 발표논문(서울: 주기철목사기념사업회, 1997), 79.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동력(動力) 한상동은 전국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들로 구성된 노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주기철에게 그것을 제의했을 때, 주기철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의 감(感)이 있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주기철에 대한 일제의 취조 기록은 신사참배거부항쟁자 군(群)에 주기철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민경배는 이 두 가지를 근거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면서 주기철을 우상숭배를 행하던 당시의 교회와 동일시하고, 한상동을 그것에 항거했던 신사참배거부운동 교회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삼은 논점일탈의 오류(Red Herring)로 보인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분리주의 운동으로 보는 전제를 갖고 있다. 우상숭배와 백귀난행(百鬼亂行)을 저지르면서 또 그것을 강요하는 당시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한 것이 부당하고, 그러한 종교기구에 대항하거나 허물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교회 조직을 구성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한국교회는 상처받은 교회였으며, 비록 순결을 잃어가고 있어도 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수호한 정통교회였다는 것이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의 정체에 대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사 기술은 대체로 다수집단의 시각이나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시종일관 신학적인 함의(含意)를 지닌 일제말기와 광복 후의 한국교회의 역사는 성경적, 교리사적, 신앙고백적, 관점으로 파악된 것이 아니라 다수 집단의 당파적 시각 혹은 친일파의 시각으로 평가되고 기술되었다. 그러한 탓으로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날조되어 있다. 일제말기와 광복 이후의 한국교회사의 역사왜곡과 날조에 대해서는 조만간에 정리하여 발표하려고 한다. 졸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에서 이미 역사왜곡과 날조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제에 항거한 운동이다. 동시에 배교하며, 이단으로 변해 가는 한국교회에 항거했던 교회운동이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회였다. 교부들이 전수해 준 보편적인 신앙을 계승하면서 유일신론과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 대한 감격과 신앙의 정조를 가진 교회였다. 우상숭배를 하고 배교하는 교회로부터 축출, 면직, 제명을 당한 교역자들은 그러한 종교 기구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그 시대에 주어진 지상 과제로 알았다. 그들이 새로운 교회조직을 가지려고 한 것은 개혁교회론에 충실한 시도였고, 종교개혁운동의 교회론적 전제를 공유한 개혁신앙 운동이었다.
1. 주기철의 시기상조론
민경배는 신사불참배 거부 항쟁자들이 평양에 모여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기로 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 해 경상남도에서 한상동, 주남선 목사가 중심이 되어 빠른 시일 내에… 비타협적 새 노회를 결성하려고 모사했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2), 325; 개정판 1982), 433.
고 한다. 모사(謀事)란 계략을 세우거나 어떤 일을 꾀하거나 계책을 세운다는 부정적인 어감을 가진 단어이다. 모의 민경배, 『대한예수교장로회백년사』(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4), 514.
도 마찬가지이다.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새 노회 결성 시도를 모사로 규정하는 이 표현에는 신사참배거부 항쟁자들에 대한 짙은 냉소가 담겨있다. 출옥성도들을 분리주의자로 단정하는 시각이며, 한국장로교 제1차 분열(고신분열)의 책임을 고신계 출옥성도들의 탓으로 보는 시각의 출발점이다. 이진구, 신사참배에 대한 조선기독교계의 대응양상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석사학위 논문; 김승태 편,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345. 기존의 노회를 해체하고, 새 노회를 조직하려고 했으며, 신사참배를 행한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하는 등을 그 근거로 들면서 새 노회 조직을 분리주의로 단정한다.
민경배는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관련을 가진 주기철의 신앙이 강렬한 유일신론, 십자가의 구속과 신앙의 정결성, 곧 순결의 신앙과 더불어 철저한 교회론을 지녔다고 지적하면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사 계보에서 때에 따라 주기철 목사가 오늘날의 고려신학파(예장 고신파)에 연결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한상동 목사와의 연결 때문에 그런 맥(脈)의 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의 교회론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론에 잇닿아 있고, 그래서 한상동 목사와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 교회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징표 때문에 정통성이 의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교회 역시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7 개정판), 6-7.
민경배는 이처럼 주기철을 기성교회(친일전력자들)과 동일시하고, 신사참배거부운동을 고려신학파(예장 고신파)와 일치시킨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민경배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주기철이 새로운 노회 조직을 시기상조라고 말했으며, 둘째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일제의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주기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주기철 목사의 교회론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론에 잇닿아 있고, 그래서 한상동 목사와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6.
고 단정한다.
주기철은 제3차 투옥에서 석방된 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들을 규합하여 노회를 조직하자는 한상동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일컬어 민경배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자들이 현존교회를 간음죄로 고발하면서 그 파괴를 공언(公言)하고 새 노회의 건설을 주장하자 주기철은 신(新) 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하면서 단호히 거절한 것으로 본다. 이 놀라운 판단이 얼마나 훌륭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광복 이후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불행한 분열에 휘말릴 때 주기철의 신앙이 분열의 전거(典據)로서 조회되지 않았던 점에 대하여, 그의 통찰력의 건전함과 심원함에 버금하는 예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257.
고 한다.
그러나 이 회합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반응과 역사의 증언은 민경배의 주장을 반증(反證)한다. 주기철이 석방된 것을 기회로 위문을 겸하여 모인 이 회합의 목적은 신사불참배주의에 입각한 노회 조직을 위한 것이었다. 3월 22일에 김린희, 김의창, 김형락, 박의흠, 방계성, 안이숙, 오윤선, 오정모, 이광록, 이인재, 주기철, 채정민, 최봉석, 한상동 등 13명이 채정민 댁에서 회합했다. 김린희는 선천에서, 박의흠은 신의주에서, 한상동은 부산에서 각각 멀고먼 길을 달려 평양에 도착했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대가 아니었다. 전선(全鮮)을 위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고 새 노회 조직을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회합에 임했던 것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전국 조직망은 이 회합이 있기 전에 이미 만들어졌다.
주기철은 농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머물 곳이 없자 채정민 목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건강을 돌보고 있었다. 한상동은 신속한 노회조직의 필요성과 멀리서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경남에[는] 반대운동이 활발합니다. 신사참배 불참 노회를 재건하자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경남은 그 실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경남만의 일이 아니므로 북쪽 여러 동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그런 뜻이 많습니다. 자꾸만 강압적으로 나오는 일제의 동향을 볼 때, 힘이 모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하여 노회가 조직되는 것이 힘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심군식, 『세상 끝날까지: 한국교회의 증인 한상동 목사 생애』 (서울: 소망사, 1977), 139-140.
한상동의 제안에 주기철은 주저했다. 만일 재건노회가 조직되고 반대운동의 세력이 강해지면 일제가 더 강압적으로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희생자가 더 많이 나지 않을까요? 심군식, 『세상 끝날 까지』, 139-140.
그는 희생자가 많을 것을 염려했다. 한상동은 말하기를(정확히 말하자면, 한상동의 전기 편찬자가 한상동이 증언한 것을 기록하기를) 그가 옥중에서 수개월 시달린 고통이 너무 컸기에 희생자가 많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도자들만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싶었다고 했다. 이 말을 하는 주 목사의 얼굴엔 피로가 서렸다고 했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한상동:] 아닙니다. 이미 반대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북쪽에는 이기선 목사가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경남도 제가 내려가면 조직을 하여 운동에 나설 예정입니다.
한 목사가 열을 올렸다.
[주기철:] 어차피 운동은 실시되겠지요. 그렇다면 동지들을 많이 모으는 일에 힘을 써 보십시다.
모두들 그렇게 하기로 힘을 모았다. 심군식, 『세상 끝날 까지』, 139-140.
이주원(이인재) 전도사는 경남에서 시작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연결시킨 연락책이었다. 그는 한상동의 조언을 받아 새 노회 조직을 위한 회합을 주선했다. 주기철이 출옥한 것을 계기로 남쪽과 북쪽의 신사참배거부운동 지도자들을 모이게 했다.
이주원의 전기는 주기철이 시기상조를 말한 까닭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옥중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시달렸기 때문에 전국적인 반대운동을 일으키면 희생이 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희생을 최소한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더 이상의 전국적 조직망으로 전개할 때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염려 심군식, 『이인재 목사의 생애와 설교』 (서울: 도서출판 영문, 1996), 68.
했던 것이다. 주기철은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궤를 같이 했으나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펼치지는 않았다. 교인들의 큰 희생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조직체를 통한 반대운동보다는 개인적인 저항, 반대를 하도록 했다.
주기철의 소극적인 태도에 진리의 투사 김린희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우리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시작된 반대운동을 더 힘차게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 2.13.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이들』, 고려신학교 개교 10주년 기념 (부산: 칼문화사, 1956) 부록.
김린희는 당장 2백원의 돈을 내놓았다. 주기철이 부산 초량교회에서 받은 사례비는 월 70원이었다. 부산지방 시찰회 소속 손양원 강도사의 월급은 45원이었다. 손양원이 1939년 8월에 애양원교회로부터 받은 사례는 65원이다. 경주황남교회, 순천 남문교회 등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받은 사례는 각각 20원이었다(출옥성도 손양원 목사 신문조서 및 판결문, 김승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증언: 어둠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 (서울: 다산글방, 1993), 296, 306; 『애양원교회당회록』(1938년 8월 22일자).
반대운동을 보다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미 거금 4백원을 한상동에게 전달한 바 있다. 일제는 나중에 그의 금품 제공과 한상동이 그것을 수수한 것을 문제 삼은 바 있다. 노회 조직에 대한 주기철의 시기상조 견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렇게 하기로 힘을 모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 일을 계속 추진, 진행시켰다는 뜻이다.
민경배가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은 신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는 표현은 김린희의 법정 진술에서 따온 것이다. 일제의 검사가 쓴 김린희의 사도행전은 민경배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전후 문맥은 다음과 같다.
서원상동에게서 경남지방에서는 금년 중에 신사불참배 노회 결성을 볼 가능성이 있으나 이는 경남만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는 의사를 개진한 것에 대하야 신천기철은 신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 상조의 감이 있다는 의견으로 결국 각자 동지 획득에 힘쓰는 일면 현존 노회 해소(解消)에 진력할 기회를 따라 운동방침 연구 토의하는 것에 끝이는 정도로 말[했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 김린희, 2.13.
주기철이 시기상조라고 하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현존하는 노회를 해체하는 일에 진력을 다하기로 하고, 그 운동 방침을 연구하고 토의했다는 것이다.
한편, 신사참배거부운동과 주기철이 무관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 근거로 시기상조론을 든다. 이상규, 주기철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와 저항, 『일사각오』 (199[7].5.15), 3; 심군식, 한상동 목사의 생애와 신앙, 『한상동 목사의 생애와 사상』(부산: 고신대학교, 1997), 29.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는 하였지만 반대운동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심군식의 주장이다.
한상동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일제에 대항하는 공개적인 정치운동으로, 전국적 규모로, 조직적인 운동으로 전개하려고 했다. 조직의 장점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기철은 한상동이나 이기선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 어쨌든 주기철이 노회라고 하는 조직체를 통해 항쟁을 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한 것이지 신사참배거부운동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주기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에 투옥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직접 간접 그것을 거부하도록 독려하는 설교를 했다. 평양신학교에서, 금강산수양관에서 열린 교역자 수양회에서, 또 산정현교회에서 그것을 설교했다. 그가 남긴 문헌에는 신사참배 거부를 독려하는 흔적들이 역력하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에 주기철 목사의 순교에 관한 짤막한 글에서 주기철이 자신을 향하여, 자신은 북에서 싸울 테니 남에서 싸우라고 백만군중에 돌격하는 장군처럼 지령 손양원, 생존시 손양원 목사가 은사 주기철 목사 순교 후 부치는 글, 박용규, 『피를 바치련다: 주기철 목사 전기』 (서울: 은성문화사, 1968), 51.
했다고 한다. 손양원에게 이것을 부탁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사참배거부에 관한 것만은 확실하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몇 차례 경찰서 유치장을 몇 달씩 드나든 주기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한상동처럼 적극적으로 전개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므로 마지막 투옥 전에 한상동의 제안에 시기상조론을 주장한 것을 두고서 그가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는 판단은 지나치다.
주기철의 아내 오정모 여사가 신사참배거부운동에 대한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것은,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의 차이와 주기철과 신사참배거부운동과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민경배의 주장대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면 오정모는 한상동이 주도하는 신사참배거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 인격, 정신, 활동을 고려해 볼 때 오정모는 곧 주기철이었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과 신학이 달랐다면 오정모가 해방 후 한상동을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초청하도록 권고하지 않았거나 초빙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기존 노회를 해체시키려고 한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오정모는 그 운동을 반대했을 것이고, 그 운동의 중심인물인 분리주의자 한상동을 거부했을 것이다.
오정모는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입하지 말라고 하면서 기존 교회를 파괴하여 분열시키는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채정민 목사 댁에서,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 (서울: 백합출판사, 1991), 225. 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 (서울: 백합출판사, 1991), 225.
이병희 댁 사랑방에서 안용준, 『태양신과 싸운이들』, 316-321.
모이는 평양지역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의 핵심 멤버였다. 우상숭배를 하는 기존교회를 불신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일은 그녀의 생애에 서 가장 긴급하고 소중한 일이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남편이 수난을 당하고, 자신이 수난을 당하고, 교회와 사택에서 추방당하고, 온 가족이 곤궁에 처했던 것이다.
오정모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전국 연락책임자 이주원과 만나 다음과 같은 협의를 한 일이 있다.
[이주원]은 동월 7일 단양광록과 함께 평양부 대찰리 112번지 신천정모를 방문하고 같은 장소에서 동인[오정모]에게 산정현교회가 노회에 대한 부담금을 거부하고 노회에서 이탈할 뜻을 종용하고, 동인 간에 그런 문제는 산정현교회가 그 소지(素志)인 신사불참배 태도를 견지하고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면 자연 해소할 것이라고, 금후 불참배 운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협의[했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 이주원, 16.22 (2월 7일자).
오정모는, 민경배가 지적하듯이, 체계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43-244.
있었다. 주기철의 아내라는 관계 외에도 오정모는 자기 나름의 철저한 신앙투사였고, 진리운동, 우상숭배거부운동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졌다.
주기철은 감옥에서 한때 과격한 재건파의 주장에 다소 동요 안도명, 『신사참배반대투쟁정신사』 (서울: 혜선출판사, 1991), 130.
된 바 있다. 오정모도 한때 재건파를 동조하여 광복 후의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신사참배거부운동원 가운데서도 가장 극렬한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안도명, 131.
주기철의 맏아들 주영진 전도사는 살아 있던 순교자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72.
로 불린다. 광복 후 평양 길재교회 담임 교역자로 시무했다. 길재교회는 이기선, 채정민 등이 주도한 혁신복구파에 속한 교회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백년사』, 537.
이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신사참배거부운동에 대한 오정모의 확신을 곧 주기철의 확신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주기철이 새 노회를 조직하자는 한상동의 제의에 시기상조의 감을 표명한 것은 조직적인 운동이 빚어낼 희생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것은 조직의 시기를 늦추자고 한 제의였다. 그의 관심은 그 시기와 희생자에 있었지, 새로운 노회 조직을 통해 우상숭배를 행하는 기존 교회를 파괴하려고 하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의도를 부당하게 본 것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시기상조의 감을 근거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더욱이 이 말을 근거로 주기철이 기존 교회를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6-7.
로 본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다.
한국교회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소극적, 피동적, 타협적으로 대처하다가 1930년 말에 총독부가 강력하게 나오자 이에 굴복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만약 3․1독립운동처럼 더욱 더 신속하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신사참배거부운동 노회가 조직되어 항일 신앙 운동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더라면, 그것은 신앙투쟁사에서만이 아니라 진리 증인의 역사에서 한 장을 찬란히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민족사적으로도 더욱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여론과 이목을 집중시켜 조선총독부를 넘어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기철이 말한 시기상조론은 여러 모로 보아 유감스런 것이었다. 시기를 늦추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으며,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시기였다. 주기철은 한상동, 주남선, 이기선을 비롯한 다른 구성원만큼 신사참배거부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개혁교회론에도 충실했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개혁교회론의 모체가 되는 종교개혁운동은 우상숭배를 행하는 교회에 항거하여 일찌감치 교회조직을 갖추었던 것이다.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교회가 허물어진 상태에서는 신속히 신앙고백적인 정통성을 가진 교회조직을 갖추는 것이 개혁교회론에 부합한다. 다시 말하면 민경배의 주장과는 달리 한상동은 전통적 교회론에 잇닿아 있었고, 주기철은 거부항쟁의 적극성에서 다소 미흡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에 교회론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지만 일제와 배교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거부항쟁의 적극성에서 차이가 엿보인다. 그러므로 그를 철저한 교회론자라고 할만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더욱이 주기철을 평남지방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중심인물이라고 한 교회사 기술은 정확하지 않다. 김양선, 『한국기독교회사연구』(서울: 기독교문사, 1973), 198.
2. 한 무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까닭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민경배 주장의 두 번째 근거는 주기철이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인해 판결을 받은 다른 피고인들과 같은 무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제 말기에 조직적인 신사참배거부운동원들에 대한 재판에 주기철 목사가 각 피고인들의 심문 과정에서 여러 번 조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 어느 한 무리에 포함되어 함께 심문 조사 받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때 일경에서 본 주기철 목사의 죄상이 이들과는 달랐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주기철 목사에게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원점(原點), 곧 저항의 원점 문제였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6-7.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는 것을 주기철에 대한 재판 기록인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를 근거로 하여 말하고 있다.
주기철이 한 무리에 끼이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한 건에 포함되어야 할 까닭도 없다. 한 건으로 처리되지 않은 까닭을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도리어 이상해 보인다.
주기철예심종결서를 현재로서 찾을 수 없지만, 역사적 정황과 그의 신학교육과 교회활동을 보아 그의 신앙은 당시의 수진수난(守眞受難) 성도들이 가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사참배 문제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한두 달 구속되었다가 풀려 나온 사람도 있고, 장기간 투옥되었던 사람들도 있다. 적극적인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한 박의흠, 최봉석(최권능), 박관준, 그리고 최상림 목사는 같은 사건으로, 주기철과 마찬가지로 순교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도 한 무리에 끼어있지 않았다. 그들도 역시 교회론이 달랐기 때문인가?
출옥성도 손양원의 판결문은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도 한 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전남 순천지역 원탁회 사건의 황두연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경북 안동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수난을 당한 대위계원집사판결문도 그 내용이 동일하지만, 경북 안동의 이하동(伊下洞)교회 집사로 교인들 사이에 신사참배에 관한 찬반이 엇갈리자 수십 회에 걸쳐 20-30명 교인들을 모아놓고 성서의 문구를 맹신하여 신사 신궁은 우상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의 참배는 결국 우상 예배로서 이는 모세의 십계명(구약성서 출애굽기 제20장)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가르치면서 신사참배를 저지했다. 교회당에서, 자택에서, 주거지 마을 도로상에서 안동과 영주의 수십 명의 신도들에게 구약성서 전도서 12장에는 영혼은 이를 주신 신께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육체가 죽을 때 그 영혼은 지상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신궁신사는 영혼이 없는 우상에 지나지 않고 이를 참배함은 우상 예배로서 십계명에 위배된다고 설득했다[대위(이?)계원집사판결문,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2권, 1142-1143; 김승태 편,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449-450].
한 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수난을 당하고 순교한 장로교인 이기풍, 감리교인 이영한, 최인규, 침례교인 전치규, 성결교인 손종갑, 안식교인 최태현도 이기선 외 20인의 한 무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김영숙, 김영달, 이술연, 염애나, 박경애, 김두석, 김두석, 감나무 고목에 핀 무궁화, 김승태 편,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의 증언』, 57.
박인순, 김두리, 김점용, 강판례, 김야모, 최달석, 김수용, 김인식, 서고분, 고재만, 조복희, 박열순, 김의순, 고권식, 1942년 8월 23일 당시에 사상범으로 수감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김두석, 67.
등 부지기수의 신실한 증인들이 수난을 당하며 경찰서 유치장에서, 감옥에서 수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1944년 9월 20일에 부산지방법원 재판소에는 29명의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 불참이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검사의 심문 후에 3년 언도를 받았다. 김두석, 94; 대한예수교재건교회 연혁 개요, 1.
한 건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이 교회론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증거를 찾기란 진도개의 족보를 찾는 것만큼 어렵다.
주기철은 1938년 2월에 1차 구속되었다. 신사참배와 일제에 항거할 것을 촉구하는 주기철의 설교를 들은 어느 학생이 격분한 나머지 평양신학교 교정에 심은 평북노회장 김일선 목사의 기념식수를 찍어버린 도끼사건으로 구속되어 27일 만에 석방되었다. 2차 구속은 그해 8월에 일본기독교단 의장 도미타(富田滿)의 강연에 정면도전한 것이 그 계기였다. 아직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 시행을 결정하기 전이었다. 제3차 구속은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와 관련하여 체포되었을 때였다. 주태익, 『이 목숨 다 바쳐서: 한국이 그룬트비히 허심 유재기 전』 (서울: 선빈도서출판사, 1977). 시온교회 모 장로가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유재기는 그 사건 이후로 일제 말기에 친일파가 되어 대구제일장로교회에서 시무 하면서 일제의 주구(走狗) 노릇을 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더욱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 제국을 준비하여 일제의 패망에 대비한 경북지역의 시온산제국 관련자들은, 유재기가 자신들을 왜경에게 고발하여 시온산제국이 수난을 당했다고 주장한다(제국 농무대신 정운훈 장로의 증언).
1939년 2윌에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제4차 투옥되었다. 일경이 산정현교회에 몰려와 주기철에게 향후 설교를 하지 말라는 협박을 했고, 주기철이 그 명령에 불복종했다고 하여 구속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주기철이 제4차 투옥되기 전인 6월에 검속되었다. 신사참배거부 항쟁으로 순교한 이기풍 목사도 그 이전에 구금되었다. 그해 9월 초, 총회 직전에 한상동, 주남선 등 수십 명이 투옥되었고, 얼마 후 주기철이 투옥되었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는 1942년(소화17년) 예 제23호, 1943년 (소화18)의 예 제2호란 타이틀이 붙여져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1945년(소화20년) 5월 18일자로 마무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기철은 1944년 4월 21일에 4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는 주기철이 순교한 후에 완성된 것이다. 죽고 없는 사람의 예심 기록을 굳이 재판을 받아 처단할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록에 포함시켜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말기에 순천노회 교직자 대다수가 체포되어 몇 년간 수난을 당한 바 있다. 이 수난 사건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것이 아니다. 순천노회는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했다. 단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천년왕국론을 설교했다는 까닭 때문이었다. 지도자 박용희 목사는 이명동일신론을 내세워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신이라고 주장했다. 신사참배가 죄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것도 불경신관으로 간주했다. 감히 천조대신을 여호와와 동등하게 본다는 것이었다.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 15명에 대한 판결문 전남순천노회박해사건 판결문, 김승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증언: 어둠의 권세를 이긴 사람들』, 267-294; 최덕성,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 재평가,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10호 (1993, 3), 171-203.
에는 이기풍과 손양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순천노회 15인 교직자들은 1940년에 체포되어 일시 풀려났고, 다시 구금되어 1944년에 풀려났다. 그들이 순천노회 교직자 15인 판결문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이 교회론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주기철이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민경배가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하면서도 바로 그 한 무리에 포함되어 함께 심문 조사를 받지 않은 자들의 예심종결서를 가지고 주기철의 수진신앙과 저항의 민족주의적 평가의 가능성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87-289.
주기철이 재판을 받은 흔적이 없다. 그에게는 체계적인 새 교회 조직을 통한 신사참배 저항운동군(群)에 대한 예심종결 형식의 판결문도 없다. 그러나 체계적인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예심종결 결정이 나 있었고, 실상 이들과 주기철과의 관련 대목이 종결서 누차 실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87.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를 보아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의 신념과 동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민경배는 이기선의 성경관, 신관, 계명에 대한 태도, 그리고 국체변혁과 일본제국의 존망, 천년왕국에 관한 신앙고백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러한 판단은 옳은 듯하다. 그러면 주기철과 이기선을 비롯한 20인의 교리, 신념, 신학은 같은데, 단지 교회론만 달랐던 것인가?
민경배는 주기철의 교회론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론에 잇닿아 있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6.
고 한다. 그러나 놀랍다고 한 그 전통적 교회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민경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전통적 교회론이 과연 장로교회가 수용해 온 개혁파 교회론인지, 극히 의문스럽다. 한상동의 교회론이 전통적 교회론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7.
그러나 아무런 논의나 근거 제시 없이, 그렇게 주장한다. 두 사람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면서, 주기철은 찬사를 받을 만하지만 한상동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단정한다. 한상동의 교회론이 전통적 교회론과 잇닿아 있지 않다는 주장은 미루어 보아 단지 그가 기존의 노회를 파괴하려는 의도로 새로운 교회 조직을 구성하려고 했기 때문인 것 같다.
3. 정통 교회인가, 이단인가?
민경배는 강의실에서도 한상동을 분리주의자로, 주기철을 정통 교회론자라고 가르치면서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상동은 무식한 반면에 주기철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1년 정도 다닐 정도로 유식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민경배 문하생인 한국교회사학도가 전해 준 것이다. 민경배가 한국교회사 강의실과 루쓰채플에서 행한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이러한 주장을 거듭했다고 한다. 사정상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한상동은 무식하여 교회론적 통찰을 갖지 못한 나머지 다소의 허물을 가진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려고 했으나 주기철은 유식한 사람이어서 한상동과는 다른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인신공격의 오류추리(ad hominem)이다.
민경배는 주기철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한 말을 가지고 주기철과 한상동의 교회론이 달랐을 뿐만이 아니라 주기철이 한상동의 교회론에 반대한 것으로 본다. [주기철이] 교회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징표 때문에 정통성이 의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7.
고 한다. 또 상처받은 교회가 순결을 잃어가고 있어도, 교회의 역사적 전통 수호의 흔적은 남아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58-259.
고 한다. 한상동 목사와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6.
고 한다. 주기철이 그 같은 신념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가 정통성을 지녔고, 그것의 파괴를 도모한 신사참배거부운동과 새 노회 조직 시도가 분리주의적이었다고 하는 판단이 옳은가, 아니면 교회론적 통찰이 결여된 특정 그룹의 당파적 발상인가? 이것은 한국교회사를 어떤 시각에서 볼 것인가 하는 것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특정 집단의 시각으로 보면 민경배와 홍택기 류의 기존의 판단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평가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상당한 역사적, 신학적 논의를 요한다. 졸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에서 이미 개괄적으로 다루었으며, 한국교회의 백귀난행과 한계상황론(『개혁신학과 교회』, 제8호, 97-122)에서 일부 다루었으며, 근간예정인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교회론적 성격에서도 상론할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도 출간할 예정이다. 다만 여기서는 논의의 흐름에 필요한 개요만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일제말기의 이른바 한국교회의 변절과 신앙고백적 상태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불허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것은 고대교회의 이단자 마르시온주의보다 더 이단적인 집단이었다. 고대교회 마르시온주의를 능가하는 이단이었다. 신도주의의 창기였다. 일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백귀난행을 저지르고 우상숭배와 민족배신에 솔선수범한 종교집단이었다.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정통성 여부는 교회사가들이 어떻게 판단하는가에 달려있지 않다.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는지 아니면 악마의 교회였는지는 특정 집단의 당파적 판단이나 그러한 시각을 대변하는 교회사가의 독단적인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주기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달려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규범공동체이다. 장로교는 신앙고백과 교회 헌법을 가지고 있다. 성경, 신앙고백, 신학에 따라 판단할 사안이다.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공교회성, 단일성, 거룩성, 사도성을 완전히 상실한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장로교회는 개혁교회론과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배교 집단이며, 이단이었다.
이 사건은 장로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 장로교가 가진 종교개혁신학과 개혁교회론 그리고 신앙고백적 전통에서 보면 그 시대의 기존의 한국교회는 거짓교회였다. 역사적 사실과 규범 공동체의 기준으로 보면 수진수난 성도들이 일제말기의 교회를 음녀 『대한예수교장로회 복구의 필연적 사실』(평양, 1946년경), 17.
로 보고, 출옥성도들은 순일본기독교로 개종한 한국교회를 이단 상게서. 이 문제는 졸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2000)에서 다루었다. 추후 상론할 예정이다.
으로 규정한 것은 정확한 평가이다. 그들의 관점은 16세기 종교개혁 교회의 관점과 일치한다. 한상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 교회가 가졌던 시각은 한국장로교회가 신앙해온 전통적인 교회관이었다.
이러한 교회론적 시각은 신사참배거부 항쟁과 광복 후의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에서, 고신교단 설립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고신교단 설립은 개혁주의 교회론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최덕성, 고신교단 설립의 교회론적 기초, 『하나님 앞에서: 고려신학대학원 설립 50주년 기념논문집』 (부산: 고려신학대학원, 1996), 141-181.
고신파는 재건파와 달리 우상숭배를 하던 자들과도 더불어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워가고자 했다. 한 신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1945년부터 1952년까지 하나의 장로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하는 장로교단으로부터 불법적으로 제거당한 후에도 약 2년간 단일 교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최덕성,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제28장, 친일파 손들어주기: 한국장로교 제1차 분열의 진상의 내용과 각주들을 보라.
맺는말
민경배가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으며 한상동은 분리주의자였으나 주기철은 정통 교회론을 유지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가 제시한 근거는 그의 주장을 뒷바침하지 못한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한 한상동과 주기철이 새 노회 조직의 시기에 대한 감(感)이 서로 달랐던 것을 가지고 두 사람의 교회론이 달랐으며, 따라서 한상동은 분리주의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제가 작성한 예심종결서에 주기철이 신사참배거부운동원들 무리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증거가 없는 한 민경배의 주장은 역사왜곡이다.
장로교는 다른 개신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규범공동체이다. 개혁교회론과 신앙고백적 관점에서 볼 때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소극적인 거부운동이 아니라 적극적인 교회개혁운동이었으며, 개혁교회론적 기초를 가진 신앙운동이었다.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정치권력에 대항해서만이 아니라 반민족적 종교집단에 항거했던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교회운동이었다. 교회라고 일컫는 집단으로부터 혹독한 박해을 받으면서, 일제의 무자비한 위협 속에서, 그 정조를 굽히지 않은 신앙공동체였다.
신사참배거분운동은 근본적으로 배교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이단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기존의 한국교회 조직에 대한 항거운동이었다. 만주의 언약자들(Covenanters)는 이미 기존교회를 거부하면서 협회(association)이라고 하는 교회조직을 갖추었다. 평양에서 신사불참배 노회를 조직하려고 한 것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구체적인 활동의 결과였다. 이것을 분리주의 혹은 분리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신사참배거부운동 차제를 분리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이 된다.
교회라고 하는 기구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행하며 우상숭배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한 종교기구에 항거하여 새로운 교회조직을 갖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과 개혁교회론에 부합된다. 성경적, 신앙고백적,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신사참배거부운동이 새 노회 조직을 시도한 것은 분리주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올바른 교회건설이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개혁교회운동이었다. 나치치하의 고백교회들이 독일기독교에 항거하여 고백교회 조직을 갖춘 것과 일치한다.
한상동과 주기철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고 있었거나, 또 신학의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오정모의 활동과 신념, 주기철 아들의 활동, 한상동과 주기철이 남긴 문헌들은 오히려 두 사람의 방향과 신학이 일치했음을 입증한다. 민경배가 한상동, 출옥한 몸으로, 한국교회 재건에 불타던 44세의 한상동을 용기와 판단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257.
이 결여된 분리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 기독교 신앙과 개혁교회론에 충실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폄하(貶下)이며, 역사왜곡이다. 한국교회사가들이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대로 하자고 하면 독선적이라고 하고, 교회의 헌장과 신앙고백대로 하자고 하면 율법주의라고 하고, 양심적으로 하자고 하면 바리새주의라고 비난해 온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그릇된 역사판단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종교 집단이 배교하고 이단적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며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항하며 새로운 교회 조직을 시도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거나 분리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교회론적 통찰이 결여된 주장이며, 한국교회를 크게 잘못 지도하는 일이다. 왜 이 같은 시각이 한국교회 안에 만연하며, 교회사가들조차 이러한 주장을 비평적인 검토 없이 수용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사를 주도하고 있는 친일파 전통 때문이 아닐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나치 정권에 항거했던 독일고백교회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신학선언』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에서 상론하고 있다.
민경배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홍택기 목사 류의 친일파 교회이해를 가지고 교회의 존재를 외형적 조직기구의 단일성에서 찾으면서, 또 로마가톨릭 교회관을 가지고 한국장로교 사건 평가의 기준, 준거의 틀로 삼는다. 이 문제는 민경배의 공교회성, 거룩성, 사도성, 단일성에 대한 필자의 근간예정 연구 논문에서 상론할 것이다.
드디어 주기철을 내세워 다수 집단과 친일파 시각을 강변(强辯)하고,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면서조차 신앙의 정통성과 민족정체성을 뚜렷이 지닌 출옥성도들을 폄하한다. 이러한 민경배의 노력은 참으로 딱해 보인다.
민경배의 이러한 평가는 역사가의 편견과 선(先)이해가 과거의 사건과 본문(text) 해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하는 역사기술은 일제말기와 그 이후의 한국교회사와 관련하여 만연해 있는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 장로교단들이 총회의 회수를 1912년을 제1회로 하여 기술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왜곡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은 고려시대의 연호나 조선왕조시대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장로교는 다른 교파들과 마찬가지로 1943년에 그 종말을 고했다. 1946년에 다시 시작했으므로 그 때를 후기 제1회라고 표시해야 옳다. (2) 장신대학, 총신대학, 개혁신학원 등이 2001년에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역사날조로 보인다. 평양의 장로회신학교는 1938년에 폐쇄되었다. 이사회, 교수회, 학생회가 없어졌고, 그것을 운영하던 교단도 사라졌다. 교사도 없다. 공동체적 관련성은 학교의 연속성을 주장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3) 한신대학은 설립목적과 이사장 차수, 전직교수 명단 등을 날조한다. (4)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일제와 야합하고 우상숭배를 행하고 백귀난행을 저지르고 민족배신을 한 것은 상황이 불가피하여 마지못해 했다고 하는 평가는 왜곡이다. 그런 점도 있으나 대개는 친일파 인사들을 주도하에서 솔선수범했다. (5) 일제말기에 한국교회가 변절, 훼절했다고 기술하는 것도 왜곡이다. 배교했으며, 심각한 이단이었다. (6) 일제말기의 교회가 신앙의 순결은 잃었어도 정통 교회였다고 하는 것은 왜곡이다. (7) 일제말기의 야합하던 교회를 일컬어 한국교회가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도 왜곡이다. (8) 일제말기에 옥중에서 수난당한 성도들이 정통주의라고 하는 덧없는 신념체계의 희생자들이라고 하는 것도 왜곡이다. (9) 첫 번째 장로교 분열과 관련하여 고신파가 독선적 신앙을 과시하면서 분리했다고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10) 출옥성도들이 3세기의 도나투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거룩성에 대한 엄격한 이해를 가졌다고 하는 것도 왜곡이다. (11) 고신파가 메첸파라고 하는 것도 일종의 왜곡이다. (12) 한국교회가 광복 후에 과거사에 대해 공적으로 참회를 했다고 하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 장로교는 신사참배취소성명서를 채택하는 죄상가죄(罪上加罪)의 해프닝을 연출했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도 이런 류의 역사왜곡이다.
한국교회는 자신이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할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지 자성해야 한다. 한국교회사가들이 한국교회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고 사회와 민족을 향한 양심의 교사가 되려면 한국교회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친일파 교회사 시각과 왜곡되거나 날조된 역사를 청산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역사왜곡과 역사날조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상태로 일본의 역사왜곡을 탓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사가들의 자아비판과 양심고백이 요청된다.
민경배가 한상동의 교회론이 주기철의 것과 같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에는 불순한 숨은 의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순교자 주기철을 내세워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정통성을 지닌 교회라는 것을 입증하고, 우상숭배를 하던 배교 공동체를 계승한 다수 집단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의도이다. 둘째는 한상동을 동력으로 시작된 고려신학교 중심의 진리운동, 교회재건운동, 참회운동을 분리주의 운동으로 몰아 부치려는 것 같다. 고려신학교와 고신파를 분리주의로 단정하려는 전주곡으로 보인다. 한국장로교회의 일차분열의 책임을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맥을 계승한 고려신학교와 고신교단에 돌리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신파 신앙공동체에 대한 폄하이며, 역사왜곡이며, 한국교회를 그릇되게 지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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