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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재림 (및 최종 파루시아)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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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데살로니가전서에 나타난 재림 ( 최종 파루시아) 개념

 

살전 4:13-18절은 전통적으로 믿어온 예수님의 미래의 재림 (the Parousia) 가리키는가? 아니면 주님의 (미래의) 재림의 긴박성에 대해 주후 70 사건으로 바울이 대답하고 있는가? 문제에 대해 우리는 살전의 주요 대적들은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살전 4:13-18 관련하여, '파루시아' (parousia, 4:15; 주의 강림)라는 말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한편으로, 혹자는 파루시아라는 용어가 헬라-로마의 황제의 도착과 방문에서 기원한 것으로 본다. 이론에 근거한다면, 바울은 지금 교회가 지상의 장소로 방문하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파루시아 외에도 살전 4-5장의 표현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정치적 함의' 인해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1) 만남 (apanteisis; 살전 4:17): 말은 왕이나 왕에 의해 파견된 사람이 어떤 도시를 방문할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격식을 갖춘 회동을 의미하는 전문용어 (technical term)이다. 따라서 용어는 바울에게 있어 주님이 오실 때에 주님을 잔치로 환영하는 것을 묘사하는 중요한 용어이다. 데살로니가 교회 당시에, 살아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일으켜졌거나 간에 데살로니가교회 공동체는 주님이 오실 , 마치 성의 대표들이 황제가 도착할 그를 만나러 성밖에 나가듯이, 주님을 맞이할 것이다 (참고 Lattke, 1990:14-15).

 

(2) 평안과 안전 (살전 5:3): 정치적인 구호로서, 살전 5:3절의 '평안과 안전' (= pax et securitas) 로마제국의 선전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말로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있다: 바울은 로마의 거짓 평화와 안전을 분쇄할 사건으로서의 주님의 날의 도래를 의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2차적인 대적은 로마제국이었음을 (적어도 암시적으로) 있다.

 

다른 한편으로, 혹자는 파루시아는 구약과 유대 묵시문학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특히 구약 선지서의 크고 두려운 여호와의 날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오시는 것과 관련짓는다. 이들의 주장의 근거는 헬라-로마 황제의 방문-파루시아의 의미와는 달리, 살전 4:13-18 전체는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를 데리고 오시는 것이지, (말하자면 로마 황제와 같은 귀한 손님이신) 예수님을 하늘에서 데리고 지상으로 모셔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특히 14).

 

 

단정지어서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아마도 바울은 헬라로마 세계의 파루시아의 의미 (황제나 고관의 어떤 도시로의 방문) 유대-구약의 묵시적인 의미 모두를 자신의 방식대로 발전시켜 사용하고 있는 같다. 하지만 전자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스피크 (Spicq, 1996:53-55)) 의하면, parousia (파루시아) 종종 어떤 사람의 도착과 방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헬라시대에는 말이 신적인 현현을 의미하든지 (참고. 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 8; 2:13) 아니면 권위있는 사람의 방문을 의미한다. 물론 파루시아는 예수님의 미래의 종말론적인 오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기독교 이전의 문헌에서 이런 용례는 없다.

 

오히려 파루시아라는 전문용어는 어떤 중요한 인물의 방문을 의미한다. 실제로 바울은 파루시아라는 말을 주님의 오심보다는 자주 자신의 현존과 방문을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고전 10:10; 1:26; 2:12; 고전 16:17; 고후 7:6-7). 편지를 통한 바울의 파루시아 (현존) 그의 신체적인 부재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용어가 등장할 문맥을 고려해야지 무조건 주님의 재림에 적용하면 된다. 살후 2:3절의 '아포칼립시스' 2:9절의 '파루시아' 데살로니가 교인들 당시의 불법의 사람의 도래인데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페러디이다 (참고 살후 2:9; 13:1, 13-14). 신약의 파루시아는 주로 헬라-로마의 황제의 어떤 도시의 방문을 의미한다고 있기에 이것은 일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며,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적 (1세기적)이다. 물론 the Parousia (미래적인 주님의 최종 재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살전에서 묘사된 주님의 파루시아는 고난 중에 있어 위로가 필요했던 데살로니가 교회를 영적으로 방문하사 대적을 물리치시는 신원의 차원으로 있다. 그러므로 70 사건과도 관련된다. 비록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의 도시이지만 그곳의 디아스포라는 여전히 예루살렘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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