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신학] 바울의 종말 이해
핵심 논지로부터 시작하자. '종말론' (eschatology)의 사전적 의미는 '마지막 것들에 관한' (of the last things) 연구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의 초림, 십자가, 부활과 오순절 성령의 오심은 종말을 도래케 하였다고 밝히기에, 오히려 종말론은 새로운 여명을 탐구하는 것 즉 '첫 것들' (of the first things)에 관한 구속역사적-종말론적인 연구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은 근본적으로 '시간 중심'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인격과 사역' 중심이다. Pfleiderer (1873) 이래로 바울의 종말론을 그 당시의 (발아적) 영지주의, 헬라신비주의 등 그레코-로마의 사고의 틀 속에 제한하여 헬라화하려는 경향이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바울의 종말론의 뿌리를 구약의 배경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많이 일어 났다. 알버트 슈바이처, 불트만, 다드, 쿨만, 리덜보스는 모두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지만, 통일되게 바울의 메시지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인 안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참고 Coetzee, 1988a:311-313).
1. '이미'의 종말론
바울의 종말론은 그의 다른 신학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로 인해 바울은 자신이 가졌던 이전의 유대교적인 구속사적 이해를 전면 교정하게 되었고, 새로운 틀 속에서 신학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틀 중에 하나가 '종말론적-구속사적 틀'이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이 메시아이시고 그의 백성에게 메시아적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면, 무언가 바뀌었다고 본다. 죄악의 영향이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 유대인의 (묵시) 사상에 의하면 오직 먼 미래에 즉 내세에 이루어질 메시아 왕국이, 바울에게는 현실적으로 이미 종말론적으로 임했다 (골 1:13).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이미 주님은 메시아 통치에 돌입하셨다 (행 13:30-41; 고전 15:23-25; 골 1:13). 지금은 부활의 주님이 그의 원수를 발등상으로 삼고 다스리시는 시기이다. 그리고 종말에 일어날 죽은 자들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부활의 첫 열매 (aparchē)가 되었다 (고전 15:21-23).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과거적이며 고립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지자 요엘이 이미 예언한 것처럼, 마지막 때의 영의 부으심이 이미 시작되었다 (욜 2:28-32; 행 2:17-21). 환언하면, 구속의 날까지 약속이 완성될 것을 보증하기 위한 인침과 보증 (arrabon)으로 종말론적인 은사이신 성령이 성도에게 부어진 것이다 (고후 1:22; 5:5; 엡 1:14; 4:30). 따라서 종말에 있을 성령 안에서의 삶이 이미 시작되었다, 히브리서의 저자 (아마도 바울)는 이와 관련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미 참으로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말한다 (히 6:5; 참고 요 5:24-25). 또한 마지막 때에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선언하실 법정적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에게 이미 일어났다 (롬 5:1, 9; 갈 2:16). 예수님의 전가된 의로 말미암아 성도는 이미 마지막 심판을 통과했고, 이미 사면을 받았다. 바울에게 있어서 지금은 종말의 때 즉 약속이 아니라 성취의 때이다 (갈 4:4; 참고 마 11:10; 눅 1:17).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의 이러한 종말론적인 이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그 뿌리를 예수님의 가르침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 임하는 일은 아직 온전한 방식으로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 나라는 먼저 은혜 가운데서 나타나며, 사실 주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 임하였다고 가르침으로써, 바울의 종말론의 기초를 놓으셨다 (막 1:15; 눅 11:20; 17:20-21). 바울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밝아온 그 구속의 사건들을 가리켜 '신비의 계시'로 바로 지금까지 감추어진 혹은 숨겨진 것을 알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롬 16:25-2; 고전 2:7-8; 엡 1:9-10; 2:3-5; 골 1:25-27; 딤후 1:9-10; 딛 1:2-3).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다 (고후 6:2). 이것은 새로운 종말론적인 비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롭게 된 성도는 '종말의 백성'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된 성도는 이미 급진적인 변화를 겪은 존재로서, 죄로부터의 단절과 새로운 부활 생명과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먼 종말에 이루어질 것 같은 천국, 영생, 성령, 그리고 심판이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위해서 현재적으로 선취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를 바울은 과거에만 그리고 예수님 자신에게만 머무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종말론적인 성격에서 찾는다 (고후 4:6; 갈 1:4; 골 1:13; 딤후 1:10).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 자체도 종말론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 시대의 생명과 권능을 체험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롬 6:3-4; 고후 2:16; 5:17; 갈 6:8; 엡 2:6). 요약하면, 구약이 마지막 때 (말세에, 그 날에)가 메시아의 때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고 예수님은 바로 이 시대를 구약이 예언한 구원을 베푸는 때로 말씀하셨듯이, 바울도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의 종말론은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를 제시하는 것과도 같다. 바울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을 연결하면서 근저에서 작용한다.
2. '아직 아니'의 종말론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바울의 종말론 중에서 '아직 아니'의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바울은 현재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생명과 오는 세상을 가져 오셨다고 밝힌다 (골 2:14절 이하). 그 결과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긴바 된 성도는 현재적으로 새 생명의 영적 부활을 경험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 (롬 6:3-4; 엡 2:6; 골 1:13). 동시에 성도는 육체의 부활과 온 우주의 미래적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 (롬 8:10-11, 18-22; 고후 4:16-18).
바울은 성도의 육채의 죽음과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 때에 발생할 육체의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빌 1:21-23절에서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현재적 상태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중간상태에서도 현재 성도가 가지고 있는 동일한 자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가 훨씬 더 좋다거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고후 5:1-10절에서 바울은 중간 상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8절에서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을 원한다는 표현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바울은 육신을 벗고 새로운 부활의 몸 (하늘의 영원한 집)을 입기를 원한다 (고후 5:2-4). 바울은 죄로 인해 주님과의 교제가 다소 희미한 현재의 상태보다는 중간 상태가 더 낫다고 고백한다 (고후 5:6).
바울은 마지막으로 미래와 영원 세계에 대해 말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악과 죄로 말미암아 변질된 우주에 질서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로 만물이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케 될 것이다. 그 날에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무릎이 꿇려 질 것이며, 모든 입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참고 빌 2:10-11). 마지막 원수인 사망도 정복당하며,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될 것이다 (롬 8:19-23). 육체의 부활과 불멸이 실현될 것이다 (롬 8:23; 고전 15:51-54; 고후 5:4-5; 빌 3:21; 살전 4:13-18). 불신자도 부활하게 될 것인데, 완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행 24:15; 롬 2:5; 살후 1:8-10). 부활한 신자는 행한 대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롬 14:10, 12; 고전 3:12-15; 고후 5:10). 사실 성도는 착한 일을 열심히 하도록 친 백성이 되었다 (딛 2:14). 성도는 거룩과 선행을 위해 구원을 받았다. 선행은 믿음과 의의 증거요,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행해지는 행위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순종하여 나오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적에서 나오는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선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내세에서 상급의 기준이 된다 (고전 3:8-9. 11-15; 4:5; 고후 5:10; 딤후 4:7). 상급은 복락의 상태 속에서 베풀어지는 영광의 정도에 관한 것이다. 즉 영광 가운데서 한 신자가 차지할 지위에 관한 것이다. 선행이 상급을 받을 만한 공로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상급이 베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은혜로이 그들에게 상급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베풀어지는 것이다. 환언하면, 그것은 은혜의 상급이다. 하지만 카토릭에서는 선행이 실제 공로가 되고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바울은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로 영원한 천국이 완성적으로 도래할 것을 밝힌다. 주님이 오실 때 죽은 성도는 부활할 것이며, 모든 성도가 공중으로 들려 (일시적인 휴거) 주님을 영접할 것이며 (apanteisis; 살전 4:13-18), 재림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이 땅으로 내려와 부활한 죄인들을 심판할 것이다 (고전 6:2). 이 세상이 한 순간에 영원한 천국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슬기로운 5처녀는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가 다시 신랑을 수행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간다 (마 25:1-13).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던 바울을 로마 교회가 로마 밖에서 영접하여 로마 안으로 들어간 행 28:15절의 'apanteisis'라는 용어가 이것을 지지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소망 중에 바라는 자이다 (살전 1:10). 최종 파루시아 때에 예수님은 메시아적 왕의 직분을 성부 하나님에게 바치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명을 완전하게 이루셨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로 가려지는 일이 없이 완전하게 드러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에서 성도는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 (살전 4:17).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완전한 교제를 누려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흡족하게 즐거워할 것이다 (고전 13:12; 고후 4:17; 참고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38문). 이것이 3위 하나님께서 창조로부터 변함없이 이루어 가신 목표요 구원의 영원한 계획이 완성되는 것이다. 교회의 '최종적인 영화'는 교회가 하나님의 최종적으로 영광이 되는 것이다.
3. 두 세대의 중첩
바울은 '이 세대' (ho aion houtos)라는 표현을 7번 사용한다 (롬 12:2; 고전 1:20; 2:6, 8; 3:18; 고후 4:4). 갈 1:4절에서는 '이 악한 세대'라고 말씀한다. '이 세대'라는 말은 시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이 현존하는 세대'라고 조금 더 풀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적인 의미 이외에 윤리적이며 계시역사적인 뉘앙스도 풍긴다. 그러므로 이 세대는 이 세대의 신인 사단의 권세 하에 있는 기간을 의미한다 (고후 4:4). 바울은 '오는 세상'도 언급하는데 (엡 1:21), 다름 아닌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고 세상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세대를 가리킨다. 참고로 이와 관련된 바울이 사용하는 다른 용어는 '세상' (kosmos)이다. 엡 2:2절에서는 'aeon'과 'kosmos'가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kosmos는 aeon의 '악한' 윤리적 상황을 반영한다 (롬 3:6; 고전 1:20, 21; 2:12; 3:14; 11:32; 고후 7:10; 빌 2:15). Kosmos는 aeon과는 달리 우선적으로 시간적인 개념보다는 세상과 생명적인 개념으로 나타난다. Kosmos는 죄의 길을 생산하며, 하나님에게서 멀리 있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과 생명 또는 생활 방식이다. 그러므로 코스모스는 장차 세상을 정죄하고 멸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장차 신자가 주님과 함께 누릴 미래의 복된 세대를 언급할 때 kosmo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Kosmos는 하나님의 세상과 화목하지 못하고 그것과 상충되는 악한 세상을 대표한다. 하지만 이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장 (場)이 될 것이다. 이유는 세상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상, 인간의 거처, 인간의 역사의 장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딤전 1:15).
바울은 '오는 세상' (the age to come, the coming ages, 엡 1:21; 2:7)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미래 세대를 현 세대와 구분되는 미래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오는 세대'가 이미 현재의 악한 세대와 나란히 존재하는 중첩 (overlap)을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세대를 알리는 것이며, 새 세대의 모든 혜택들의 원천이 그리스도이시며,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세상에 이 복이 임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루신 구속의 사건 이후에 일어난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에서 바울은 다름 아니라, 오는 세대를 경험하게 되었다. 바울은 때의 충만을 가져오신 분을 만났다. 그는 잠자는 자의 첫 열매이신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고전 15:20). 그는 자기를 새 사람으로 만드신 마지막 아담을 보았다 (고전 15:22). 그는 육체의 길에서 자유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영을 경험했다 (갈 5:16-24). 그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고후 4:6). 바울은 영원한 세상의 충만을 경험했다.
바울은 고후 6:2절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이요 최종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때의 충만이라고 주장한다. '은혜 받을 만한 때'와 '구원의 날'은 '때의 충만'에 상응하는 말이며, 성취와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결정적이요 오래 기다렸던 하나님의 오심, 즉 때의 마지막과 구원의 날이 동텄다는 의미이다. 골 1:15-18절에서 예수님은 '근본'이요 '먼저 나신 자'이신데, 이것은 시간적인 우선인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처음이라는 의미라기보다, 자신의 백성의 부활의 길을 여신 선구자요 창시자라는 의미이다. 근본이신 주님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새로운 세상을 가지고 오셨다 (딤후 1:10; 참고 롬 8:29).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는 세상-부활 세상에 이미 참여했다 (골 3:1). 오는 세상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을 위해 존재하는 세대 (골 2:20; 3:1-17)와 대조되는 '부활 생명의 세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이해한다 (고전 15:20). '첫 열매'는 '먼저 나신 이'와 '근본' (arche)과 관련있다. 전체 추수를 대표하는 첫 열매가 예수님 이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신자의 부활의 처음이시다.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대비하면서 옛 세상과 새 세상을 대조한다. 이 두 아담은 개인들 뿐 아니라 두 대척되는 생명의 질서와 두 세대와 두 역사적인 세상 질서의 대표자들이기도 하다 (롬 5:12-21). 아담이 첫 사람인 것은 그 사람 이전에 아무런 세대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둘째-마지막 아담이신 것은 첫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아무런 세대가 오지 않았고, 그리스도 이후에 아무런 세대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은 사망의 세대를 창출했지만, 둘째 아담은 부활의 생명의 세대를 창출했다. 바울 서신에서 육체와 영의 대조는 두 아담 개념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육과 영의 갈등 역시 계시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육체 즉 세상적인 것과 영 즉 천상적인 것은 서로 싸운다 (엡 1:14, 21; 2:7, 12; 4:4, 30; 5:6; 골 3:4; 6:24; 빌 1:6; 2:16; 3:20). 육체는 사람과 세상이 어두움의 세력하에 있는 존재 양태이다. 반면에 영적인 존재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시작되는 존재양태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영의 영원한 세상에 살고 있으나, 동시에 육체의 잠정적인 세상의 영향도 받고 있다. 성도는 이 대립되는 두 세대 속에 즉 중첩 속에 살고 있지만, 현 세대-악한 세대의 시민은 아니다. 바울은 성도를 육의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성도는 악한 세상에 있으나, 이 악한 세대에 속하지 않는다. 오는 세대에 속하여 있다. 그런데 '오는 세상'을 불트만은 하나님 앞에서 옛 실존을 깨뜨리기 위해 성도가 '실존적인 결단을 하는 지금'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즉 '실존적인 지금'은 신자가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불트만의 견해와는 반대로, 바울은 우리의 실존적인 결단과는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즉 객관적인 그리스도와 성령의 오심이라는 구원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오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성도의 모든 세계관과 인생관은 오는 세대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주님의 최종 파루시아 때에 이 악한 세상, 육체, 첫 아담의 영향은 완전히 사라지고 둘째 아담, 영, 오는 세상이 완성될 것이다 (보라. 윌리암 데니슨, 1995:56-73).
* 고신대 송영목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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