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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바울신학_바울의 율법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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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바울의 율법 이해

* 고신대 송영목 교수님의 글입니다.

 

바울의 율법관을 이해하지 않고 바울 신학을 논할 없을 만큼 바울의 율법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현대의 학자들의 주장은 참으로 다양하다. 1977 E.P.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이라는 책에서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 주장하여 기존의 주장을 덮으려고 했다. 샌더스에 의하면,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와 구원을 추구한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의와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므로 샌더스는 바울이 자기 당대의 유대교와 율법을 비판한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기 의나 구원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단순히 당시 유대교와 다른 패턴의 구원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사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샌더스가 재구성한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과연 신빙성있는가? 그리고 그가 인용한 자료들은 1세기 팔레스틴 유대교를 대변하고 있는가? 관하여 많은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샌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과연 자기 당대 유대교를 율법을 통한 일종의 행위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언약적 율법주의로 여기는가? J.D.G. Dunn 샌더스가 주창한 '바울의 관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율법과 율법의 행위에 관한 각론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이견을 보인다. Dunn 다음과 같은 주장도 정당한가?: "바울이 서신에서 율법을 비판하거나 거부한 것은 율법이나 유대 종교 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특권의 기반으로 삼았던 음식법, 할례, 정결법, 그리고 절기법에 불과하다." 이들의 주장은 전통적인 견해를 엎을 만큼 결정적이지 못하다.

 

 

바울 신학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 역사를 선포하고 변증하고 적용하는 선교적 동기와 목회적 현장에서 형성되고 전개되고 있기에, 바울의 율법 이해도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울의 율법관은 이전에 율법의 신봉자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발견한 새로운 구원의 도리,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놀라운 믿음과 은혜의 복음을 발견한데서 출발점을 가진다. 위대한 복음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전하려는 선교적 동인이 유대 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을 촉진시켰던 것이다.

 

1세기 유대인들의 율법관은 다음과 같다: 먼저 유대인들에 있어서 율법은 샌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아니라, 사실상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얻을 있는 의와 공로의 수단, 이미 그들이 오는 세상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신봉되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었을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악을 억제하고 죄의 위협에 대처함으로써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도록 하는 삶의 보루요 도구였다. 바울은 이러한 율법주의를 반박한다.

 

1. 구원의 수단이 없는 율법

 

구약의 메시아 사상이 주후 1세기에 와서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민족적인 방향으로 변모되었듯이, 율법도 오는 세상, 메시아 시대에 주어질 복을 받기 위한 수단과 조건으로 변모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나쁘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 ( 7:12). 율법은 신령하며 ( 7:14), 신적인 영광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고후 3:9-10), 하나님의 법이다 ( 7:22). 원래는 윱법이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 7:10). 울법을 먼저 받아 맡은 유대인에게는 특권도 있다 ( 3:2; 9:4).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없음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런 주장의 원인을 율법 자체에서 찾을 수는 없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을 아니라, 바로 진리에 기초하여 율법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 3:4 이하).

 

율법이 유대인에게 구원의 수단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2:1-3:20절에서 유대인의 위선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는데, 유대인은 율법을 통한 의를 추구하면서도 실제로는 율법을 범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그들에게 구원의 수단이 없다. 유대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못하기에, 율법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가져다 주고 만다. 바울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를 가능하게 만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비로서 구원의 수단이 없는 율법의 한계를 발견한다 ( 2:12; 3:13). 그리고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심 자체가 인간의 행위나 공로를 내세우게 하는 교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조차도 무시하고 거부하게 되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율법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것이다 ( 10:2-3).

 

2. 죄를 억제할 없는 율법

 

바울은 율법이 악의 경향성을 제어시키고 죄를 대항하는 무기가 된다고 믿던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율법은 반대로 인간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고 ( 3:20; 7:7), 죄를 죄되게 하고, 죄를 불러 일으키고, 죄를 증가시켜 인간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여 ( 5:20) 마침내 인간을 사망으로 끌고 간다고 주장한다 (고전 15:56).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 7:12), 사람 안에서 율법이 죄를 억제하거나 제거하기는커녕 죄의 출발점이 되며 죄의 촉진제가 되고 만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지킬 없는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율법은 인간을 율법의 저주 아래로, 절망과 사망으로 끌고 가고 만다 ( 4:15; 8:3). 율법과 죄의 이러한 연결 고리 때문에, 바울은 죄의 부패와 저주로 묘사되고 있는 특성을 율법에 적용한다. 죄가 사망을 가져오는 것처럼 율법도 그러하며 ( 6:16, 21, 23; 8:10), 죄가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과 같이 율법도 그러하며 ( 6:12, 14, 16, 17, 20; 7:1; 3:22-23; 4:4-5), 인간이 아래있는 것과 같이 율법 아래에 있다 ( 6:14-15; 고전 9:20; 4:5, 21; 5:18).

 

3.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

 

구원의 수단도 아니며, 죄를 억제하는 것도 아닌데, 율법은 무슨 이유로 사람에게 주어졌는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경륜 안에서 율법은 긍정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가? 4, 9-11, 3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한 의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은 율법 이전에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셨음을 바울은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련하신 의와 구원의 길은 율법을 통한 길이 아니라 약속과 믿음을 통한 길이다 ( 4:9, 20-22; 3:6-7). 율법은 구원의 길로 주신 것이 아닌데, 범법함을 인해서 더해 것이다 ( 3:19). 말씀은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는 의미뿐 아니라 ( 5:13; 7:9), 적극적으로 범법함을 산출하기 위한 것도 함의한다 ( 4:15; 5:20). 바울은 이처럼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기는커녕 오히려 죄와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을 가져다 주는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인간에게 믿음을 통한 구원의 필연성을 더욱 강하게 일깨워 주는 율법의 긍정적인 목적을 발견한다. 3:19-24절에서 이러한 율법의 긍정적인 기능을 몽학선생 (paidagogos)으로 비유한다. 율법이 인간을 정죄하고 죽이고 속박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통하여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나타날 구속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함을 기다리도록 한다. 10:4절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에게서 율법이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율법은 기능을 상실하고 폐지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이 율법의 지향점이요, 목표요, 성취요, 최고 절정임을 뜻한다. 율법은 종국적으로 인간을 율법의 목표요 절정인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구원사에 있어서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이러한 부정을 통한 분명한 긍정의 기능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4. 성도의 삶의 원리가 되는 율법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성도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 7:4-6; 8:2-3; 2:19).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 3:13). 그러나 바울은 3:31절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사랑의 계명에 메여 있고 ( 13:8-10),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 (Christ's law) 성취해야 했다 (고전 9:21; 6:2). 성도는 이상 정죄와 죽음을 주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율법의 성취자요 목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거룩한 의지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의 본래적 기능을 회복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없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은 율법은 예수님 없는 사람들을 계속 정죄와 죽음으로 이끌지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성도에게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성도는 이제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으로 알고 즐거이 순종한다. 율법은 성도의 새로운 윤리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인도한다. 도덕법은 말할 것도 없고, 구약의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개념으로 우리의 삶의 표준으로 작용한다.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3 기능과도 관련되는 이런 율법의 성취된 의미를 지혜의 자녀들은 분변해야만 새로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바울은 반율법주의자 혹은 율법폐기론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가르친 혁명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율법이 무효하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속에서 바리새적인 율법 이해를 버리고, 진정한 기능과 목적을 깨달았던 것이다 (참고 최갑종, 1992:5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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