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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구원론_성령의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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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 성령의 사역

성령의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

 

일반은혜 (common grace, = 일반은총, 보통은혜): 구원과 상관없이 피조물 일반에 베푸시는 은혜

특별은혜 (Special grace, = 특별은총): 구원받은 자녀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

   

일반은혜의 예

▷ 진선미에 대한 분별력

▷ 자연적 선()의 수행

▷ 각종 재능

▷ 자연적 축복들

   

Cf. 용어 구분: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계시

은혜

일반

성경

그리스도

특별

성경

그리스도

 

칼빈, 히드라 예화  

   

    

그는 우리의 죄의 구렁이 얼마나 깊은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에는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으며, 이 히드라(hydra,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인 뱀)에게는 얼마나 많은 머리가 있으며, 죄는 얼마나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악행의 깊은 구렁 밑에서 주를 향해서 나는 눌렸나이다, 묻혔나이다, 숨이 파히나이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시 18:5),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지며"(시 69:2-3, 15-16), 원컨대 손을 내밀어 주소서, 나는 힘이 빠지고 죽어 가나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www.aspire7.net/picture/기독교강요1559한글판.hwp

   

   

For Calvin, of course, it is sin that makes people such creatures. Recalling the many-headed monster

of pagan myth, Calvin said that the wicked tendency of the human heart "lurks in the breast" of each person like a hydra. The sinful inclinations are so plentiful, he continued, that few people understood "how many heads" this beast bears, "and what a long tail" it drags along (Institutes 2.3.2,3.4.16).

http://www.etsjets.org/files/JETS-PDFs/42/42-1/42-1-pp067-075_JETS.pdf

   

   

   

성령의 내주하심 (indwelling)

가. 의미

단지 성령의 은혜가 아닌, 성령님 자신 (person)의 내주

독특한 형태의 하나님의 계심.

   

내주는 특별한 형태의 임재 (presence)

비교 편재 (Omnipresence) 시 139:7-9

시 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9 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내주 (indwelling) : ① 특별은혜의 대상에게만 한정 (편재의 의미에서는 블레셋 진영에도 계심. 그러나 법궤와 같은

곳에서는 내주하심. 편재의 의미로 볼 수 없음.)

② 거처로 삼고 떠나지 않으심

   

   

나. 관련구절

■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oijkei) 알지 못하느뇨

■ 엡 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엡 2: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영향력이나 에너지 만이 거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이 거하신다.

   

각 개인 그리스도인 안에 계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계심.

   

   

   

다. 생각해 볼 점.

하나님의 단순한 파워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계신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인격으로 계신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 자신의 영적 내면을 들여다 보면, 우리 자신이 과연 하늘의 왕이 집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곳인가? 하나님이 지닌 속성 순결, 온유, 진실…...과 반대되는 가식과 자기(육,self, flesh)중심, 포학함이 우리 속에 있다. 내면에 이런 더러움을 가지고 있는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 "내가 만약 내 안에 들어가서 Oikew 하면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아더 핑크

"우리들 스스로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를 참으로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며 하나님 한 분만이 그 속을 살필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렘 17:9) 성령께서 더러운 탐욕과 하나님에 대한 증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악함의 오물더미로 가득 찬 그런 더럽고 추잡한 마음 속을 파헤치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그분에게는 그 일이 얼마나 싫은 일이겠는가!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사 처녀의 태에 들어가셔서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기까지 하셨다면, 성령 하나님 역시 자신을 낮추사 우리의 부패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의 악한 생각들을 휘저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고난을 참으신 그 분의 측량할 수 없는 겸손에 대해 찬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면, 우리에게 죄를 통회케 하시기 위해 강림하신 그 놀라우신 분께도 특별한 찬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사 4:4)으로서 활동하시는 그 분께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The Holy Spirit. Ch. 13. "The Spirit Convicting")

   

우리는 주로 성자 예수님의 사역은 자주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 성령님의 내주하심도 묵상하며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다.

   

쥬라기파크에서 주인공이 공룡의 배설물을 손으로 뒤지는 장면처럼….. 성령님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고, ….

   

   

죄 -> 하나님 뜻 근심-> 회개->구원

청교도들이 자주 언급하는 Godly sorrows 경건한 슬픔

야고보 :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우리 안에 경건한 슬픔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좋은 징조이다. 없으면 이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왜 이렇게 식어 있는가? 왜 간절함, 사모함이 없어졌는가? 성령님께서 죄를 드러내시고, 죄를 애통해하며 회개함에 이르는 은혜의 사역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신학은 노래가 되어야 하고, 노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교리만의 나열이 아닌, 송영(doxology)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교리들을 이야기 하다가 송영이 튀어나오고, 찬양을 하곤 한다.

   

   

   

라. 정도의 차이

내주의 정도 혹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정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존 오웬이 말하는 성령의 떠나심

"성령께서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부분적으로 철수하시고 떠나시는 일이 있는데 이때는 대부분의 경우 한동안만 그렇게 하신다. 이 떠나심이란, 성령께서 신자들을 향해서 역사하시는 은혜와 빛과 위로에 관한 것인데, 특히 이러한 것들의 정도에 있어서, 그리고 신자들이 자신들의 영혼 안에서 이런 것들을 감지함에 있어서의 달라짐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같은 은혜와 빛과 위로를 구원론적으로 베푸시기 위해 성령께서 주어진 경우, 성령님은 결코 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혹은 전체적으로 떠나시지는 않는다. 이 점을 우리의 찬양받으실 구주께서는 명백히 약속하시고 주장하셨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이 '생수'의 샘은 주님 자신이 7:37-39에서 선포하시듯 그분의 성화(구원)시키는 영을 가리킨다.

   

   

성경적 뒷받침

■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 살전 5: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P.9

   

성령의 떠나심. A. 구원론적 의미에서 완전히 (X)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약해지거나 중지되는 것 (O) -> 이런 측면에서 오웬은 이렇게 성령의 떠남을 쓸 수 있다고 주장.

   

   

예배가 프로그램화(순서와 형식)되어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임재 없는 예배를 매주일 형식적으로 드릴 수도 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셨다.

팔머 P40 쯤에 있음 (성령의 내주하시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은 우리가 동의)

   

   

   

   

3. 그리스도와의 연합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머리….

   

머리와 몸의 비유는 분리 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만큼 강력하게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하나님께서 묶으셨다.

   

엡 5:

   

   

   

* 이적적 은사는 고전 12장의 은사들 중 병 고치는 신유, 혹은 치유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살아 있을 수 있다고 믿느냐 혹은 중지되었느냐 하는 견해가 있다.

   

웨인 그루뎀의 책 참고할 수 있음.

내 생각을 정리해서 과제물 제출

   

   

   

4. 성령의 은사

가. 이적적 은사의 계속성 문제

   

1) 은사중지론

   

2) 신중 수용론

   

3) 제 3의 물결

   

4) 오순절/은사주의 Pentecostal, Charismatic : 더글라스 오스

윌리암 조지프 시무어, 성결교회 목사, 방언이 성령 세례의 증거라고 주장하다 교회에서 쫓겨남. 그후 가정 집에 모여서 사람들과 기도회를 열고 있다가 방언이 터지게 되고, 숫자가 늘면서 알주자 거리의 창고로 옮겨 집회를 계속하게 됨. 오순절 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

   

은사주의와 오순절주의의 차이점

1960년대에 이르게 되면서 오순절 교단의 특징이 오순절 교단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교단에도 영향을 미쳐서 오순절 운동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게 됨.

   

방언이 성령 받음의 증거로서 제기가 되었고, 영적 은사들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함. 방언이 가장 주시되었음. 중생 이후 강력한 영적 체험으로 인해 받은, 제2의 축복으로 받은 증거라 함. 사실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으로 구분지어버렸음. 방언 받은 제2의 축복 받은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으로 나뉘게 됨.

   

제 3의 물결 : 1980년대 빈야드 운동. 새뮤얼 스톰스, 메트로 빈야드교회 부목사이면서 그레이스 트레이닝 센터의 훈련소장을 맡으면서 이 입장을 대변하고 글을 쓰게 됨으로 시작. 오순절 은사주의와 똑같이 은사가 계속해서 부어진다고 생각.(이적적인 은사에 대해서 열려있음) 피터와그너가 붙인 이름을 이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가져와서 붙임.

차이점은 성령세례를 제2의 축복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 성령세례 받는 시기는 예수님을 믿을 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함. (맞는 이야기)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주장하지도 않음.

그런데 이 그룹에서는 모든 은사를 다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함. 예언, 치유, 방언…… 그 모범으로서 예수님을 듦.

우리의 사역의 모델이 예수님으로서 제시가 되는데, 예수님의 이적적인 모든 사역이 은사를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함. 나다니엘을 미리 본 것, 지식의 은사. 여기에서 기독론적인 문제가 나타나게 됨. 예수님이 모든 은사를 받아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중에 인성이 부각되어지는 것.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부인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사역속에서 신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사실상 거의 없게 되는 것임. 그래서 케노시스 이론과 굉장히 가까워있음. 케노시스 이론은 스스로 그 신성을 비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 처럼 풍부한 은사를 받아 사역 할 수 있다고 주장함.

복음서에 나타난 표적과 기사들, 기적들이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 초대교회 사도행전에 나타난 현상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정상이고 진정으로 복음전파가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이런 일들이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함.

빈야드 운동 창시자 존 윈버, 능력 전도라는 책. 이런 능력이 나타날 때 많은 불신자들을 회심시킬 수 있다고 함.

종말을 강조. 종말의 회복과 대부흥, 대추수를 강조함. 마지막 때, 지금이 그때라 함. 대추수 운동, 교회를 회복시키시고 교회로 많은 사람을 몰려들게 하는 일을 행하고 계신다고 주장.

IHOP 마이클 비클, 국제기도의집(1990년대), 2000년대 시작된 신사도운동이 공통점을 보이고 있음. (제 3의 물결에서 발전한 그룹들로서 같은 특색을 가지고 있음. 공유.)

주의할 용어들 - 7대 영역이라는 용어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는 표현이 많이 나옴.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기성교회, 말씀의 문자주의에 빠져 성령님을 거부한다고 함) 성령초청. 다윗의 장막.

기도의 방식 - 대적기도, 영력기도, 선포기도

부흥의 때를 단정해버리고, 말세, 마지막 때와 연결시켜서 준비해버림.

   

   

   

신중수용론 OPEN BUT CAUTIOUS 로버트 소시 탈봇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중간정도의 입장론.

은사들이 중지되었다고 보지는 않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적적인 은사들이 있을 수 있다고 봄.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하고 활용하고 있는 교회들에서 성경적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임. 비성경적으로 은사들이 발굴되고 연습되고, 남용되기도 한다고 봄.

 

  

 

   

나. 예언의 은사

- 시험 문제로 나올 수 있음.

1) 계시라는 용어의 사용 문제

좁은 의미의 계시 -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넓은 의미의 계시 - 어떤 통로에 의해서건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전달되는 것.

   

   

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성령의 조명하심.

   

고전 14: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 14: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고전 14: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계시 라는 용어 사용 문제 : 비성경적이지는 않지만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혼동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1) 교회가 역사적인 기독교 안에서 계시가 특별계시와 동일화가 되어가고 있다.

2) 예언을 계시라고 말해버리면 예언이 성경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혼동을 할 수 있게 되버린다.

3) 신약의 경우를 살펴 볼때 예언이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웨인 그루뎀 - 예언의 은사를 인정하는 사람. 사도라는 호칭의 사용에 대해서는 불가.

   

   

역사적 기독교 Historical Christianity

1) 2000년 교회 역사를 통해 물려 받은 신앙의 유산들.

특히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관련된, 즉 교리적 유산.

   

   

2) 공의회 신조, 신앙고백서, 고대교부들의 학설

   

니케아 공의회(325년) :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 : "성령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

에베소 공의회(431년) : "크리스토토코스냐, 데오토코스냐."

칼케돈 공의회(451년) :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 : "한 본성이냐, 두 본성이냐."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년) : "하나의 의지냐, 두개의 의지냐."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년) : "우상이냐 성상이냐."

   

   

3) 경계해야 함

   

(1) 절대시 - 역사적인 기독교를 절대시 하면 안됨. 우상화 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성경보다 높을 수 없음. 언제든지 수정을 받을 수 있는 것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승, 전통을 성경의 권위와 동등한 레벨로 취급함. 성경에 없는 교리들을 언제든지 만들어 내는 구조를 가지게 됨.

   

(2) 무시, 소홀, 거부 - "전통주의, 전통에 집착, 고리타분, 케케묵은 교리"라고 말하면서 소홀히, 무시함.

   

성경에 바탕한 교리는 우리가 받아들일 만한것이라 소홀히 해서는 안됨.

   

 

4) 종말의 전적으로 새로운 것?

   

   

성경과의 관계

세번째 그룹이 예언을 더 강조하는데, (네번째 그룹보다 더) 말로 성경을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강조한다고 말한다. 예언과 성경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도자들 사이에 상당한 반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서 어떤 문제가 형성되어 있는가이다. 실제적으로 성경에 대한 권위가 감소되어 있다. 환경과 서로의 영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2014-04-22 오전 9:23

   

다. 치유의 은사

"질병으로부터 치유됨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인가?"

   

치유 은사 강조하는 이들이 하는 말:

모든 병은 마귀의 일,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부터 치료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는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치유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결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 아니다. 약 5:14-16

병이 마귀와 관련 있다는 것도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식의 설명은 모든 병을 부정적으로 보게 할 수 있고, 성경의 가르침에도 반대되는 것이다. 욥2:10 / 고후 12:7

   

   

   

5. 말씀과 성령의 관계

A. 균형의 필요성

둘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음

말씀 없는 성령 / 성령 없는 말씀

   

1) 칼빈

시편 119편 18편 칼빈 주석에서 인용. 성령의 조명.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는 어떤 비밀한 영감과 자신의 상상으로 대체하는 현상에 대해서 주의. 우리가 받는 조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말씀을 통해 드러내신, 기록된 계시이다. 생명의 빛을 분별해 내도록 해주시는 말씀이다.

   

교회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성령을 강조하면서 기록된 계시를 소홀히 했을 때에 중간에 바다로 흘러 떠내려 갔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퀘이커 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성령의 내적인 빛에 너무 강조를 두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옆으로 밀려나게 되고, 그들이 교리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성령이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지만, 다른 수단보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가장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 행 1:16, 20. 성경기자, 시편을 기록한 사람들. 그러나 원 저자는 한분이시다. The Author.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미리 말씀하신 성경의 예언이 응하다.

   

   

2) 존 오웬

유효적인 : 그 일이 실제로 되게하는

   

3) 성경

   

   

B. 말씀의 중요성

칼빈 : "우리가 받는 조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 통해 드러내신 생명의 빛을 분별해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성경을 기록되게 하셨다.

   

   

C. 성령의 중요성

가.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

영감, 조명,

성령께서 최초성경 기록자에게 역사하신 것을 영감이라 부른다. (유기적인 영감, 축자영감)

이미 기록된 말씀을 사용하셔서 신자의 삶에서 역사하는 것을 빛을 비춰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조명이라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먼저 성경의 명료성, 충분성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말씀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들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는데 성령의 내적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칼빈은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오게 할 수 있는 도움이 되시고, 성령의 내적 조명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올 수 없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기록된 문서로서의 성경으로서는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칼빈이 말하는 것은 성경자체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닫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빛을 주시는데, 우리의 눈에 베일에 가려있다면, 닫혀 있다면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그 빛을 볼 수 있다. 온 인류의 눈은 이렇게 닫혀 있고, 맹인처럼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다.

   

성경도 성령의 조명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시 119편 18절 내 눈을 열어 주의 말씀의 기이한 것을 보게하소서 : 성령의 조명하심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신약에도 눅 24:45절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셨다. : 성령의 조명하심.

   

24:32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성령의 조명이 있으니 마음이 뜨거워지고, 삶을 움직이는 은혜를 주셨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성령의 조명과 학문적 성경해석 방법

대립이 아닌 상보적이다.

"성령의 조명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고, 표준적인 사전을 찾아보는 수고를 기도 모임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 버나드 램.

   

성령과 지성의 관계

생각의 문제이고,

오늘날의 성령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의 경우 성령의 작용이 있기 위해 지성이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성의 활동을 배제시키려는 주관주의적 위험을 자처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지성이 중지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인가 아닌가? 뜨거움이 왔을 때, 오히려 머리는 차가워지고, 가슴은 뜨거워 진다고 한다. 반대로 된다면 흥분상태로 감정적 고조만 되는 때도 있다. 전자가 더 바른 경우인것 같다.

   

영적인 지식은 성령이 가르쳐 주신 지식이다. 영적인 지식의 특성은 성경에 있는 것이다. 성령이 알려주셔야 깨닫는 부분이 성경에 있다는 말이다.

   

가장 연약한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에도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심겨지게 된 구원적 지식(영적인 지식)의 극히 작은 불꽃이,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의 이해력에 의지하여 얻게 된 최고의 지성들과 정교한 추론들보다 훨씬 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준다고 오웬은 이야기 하고 있다.

   

   

p25

   

나.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

오웬은 성령의 실체를 보여주신다고 한다. 우리가 봐야 할 영적인 대상들, 그 속에 깃듯 아름다운 모습, 진리의 실체를 보게 하신다. 진리나 교리에 대해서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파워, 힘도 나타내신다. 제자들의 모습처럼. 실재, 실체를 드러내 주셔야지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양식을 얻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영적 실재로 인식한 로이드 존스도 영적인 부흥을 이야기 했다. 부흥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데, 들어온 많은 진리들이 눈 앞에 있는 영적인 진리들, 실재를 인식하게 해준다. 그것들을 명확히 보는 것으로 부흥의 시작이 나타나게 된다. 신자들이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와 실재를 인식하게 될 때, 영적인 진리들을 분명하게 다가오게 되며, 성령의 조명인지 알게 된다. 마음의 내적인, 심령에 빛이 비추이게 될 때 모든 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성령이 정신과 지각을 밝혀 주셔서 영적인 것을 보게 되고, 그 능력까지 느끼게 된다.

   

언제 세상이 교회를 주목하게 하나? 위와 같은 것들이 준비될 때 세상이 교회를 보게 된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기뻐한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다고 말함.

   

성경적 근거로도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하소서. 눅 24장 45절에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심(시편과 모세의 글들을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었음)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듦.

   

학문적 성경 해석 방법과 성령의 조명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보적인 것이다.

성령과 지성의 관계는 성령께서 지성을 더 민첩하고 날카롭게 해주심. 그러나 학문 만으로는 깨달을 수 없음.

   

P25.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

오웬 : 성령께서 실체(실재)를 드러내 보여주심

로이드 존스 : 영적 실재의 인식

앤드류 머레이 : 영적 아름다움을 봄

칼빈: 새로운 시력과 미각

조나단 에드워즈 : 마음의 감각으로 아는 지식을 가지게 됨.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기 보다 학문과 지식, 조직, 활동에 의지하는 경향이 아직도 강하다고 이야기 한다.

   

P27.

D. 성령의 조명을 위해 요구되는 자세

1) 겸손

오웬은 성령의 가르쳐 주심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겸손과 온유함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을 아는 지식 '영적 지식' -> 성령께서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알게 해준다.

경박하고 오만한 자세를 버리고, 바른 자세로 성령의 조명을 위해 기도해야 함. (그렇지 않을 경우, 말씀을 닫아 버리게 됨.)

알프스 등반자의 예화 : 알프스 산을 젊은 등반자가 오르고 있는데, 앞뒤로 가이드가 따라 붙는다. 노련한 가이드의 도움으로 안심하고 젊은이가 산을 오르다가, 앞에 있는 가이드가 뒤로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왜냐하면 이 젊은 이가 정상을 먼저 오를 수 있도록. 젊은 이는 정상에서 기뻐하며 승리에 도취되어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두 가이드가 그를 만류했다. On your knees sir! 여기서는 무릎을 꿇고 납작하게 엎드려야 한다고 설명함. 왜냐하면 정상에서는 돌풍이 불어서 위험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세도 겸손함으로 무릎을 꿇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Safe Only on Your Knees

Sir George Adam Smith tells how he and his guide were climbing the Weisshorn in the Swiss Alps. It was stormy and they were making their climb on the sheltered side of the peak. When they reached the summit, they were filled with the exhilaration. Sir George forgot about the fierce winds, leaped up and was nearly blown over the edge to the glacier below! The guide grabbed hold of him and exclaimed: "On your knees, sir. You are safe here only on your knees!"

   

원본 위치 <https://bible.org/illustration/safe-only-your-knees>

   

   

   

   

2) 진지함

토저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는 자에게만 말씀하신다. 성경은 눈물 속에서 쓰였고,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읽는 사람에게만 최고의 진가를 발휘한다. 하나님께서 경박한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하실 말씀이 없다.

오웬 '준비된 자세'로 읽어야 한다. "우리에게 계시되고 신적 진리들을 수납할 마음의 준비, 그리고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깨달은바 교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 이것이 성경을 요구할 때 우리의 중요한 의도와 목표가 되지 않으면 안됨.

Ex) 트로트 찬양

   

   

3) 순종

오웬 실제적 순종의 삶 -> 말씀의 진리에 대한 확신에 도달 가능 / 경건한 삶을 포기하면 결국 진리에 대한 지식마저도 놓치게 됨.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 7:17)

   

Intellectual knowledge -> 겸손

Spiritual knowledge -> 진지함

Moral knowledge ->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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