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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성령의 은사(네 가지 입장)_은사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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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네 가지 입장)_은사론 정리

성령의 은사에 관한 네 가지 입장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어떤 은사론을 믿어야 할지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주로 네 가지 분류로 은사론을 열거해 볼 수 있다.

 

1) 은사중지론

2) 신중 수용론

3) 제 3의 물결

4) 오순절/은사주의 Pentecostal, Charismatic

 

네 가지의 은사이론 중에서도 성경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나의 입장은 두 번째 신중수용론이다. 은사는 중지되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부어질 수 있다는 견해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복음이 전파되며 교회가 세워지는 선교의 현장에서 이적적인 은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본다.

 

 

 

내가 속한 장로교회의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은총" 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신학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하여, 계속해서 성령의 지혜와 능력을 부어주심을 믿으며, 중생한 성도에게 한 몸된 교회를 위해 각양의 봉사적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순절 교회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은사주의 운동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오순절 성령운동은 "인간의 의지적 행동"을 강조하는 알미니안 주의가 그 기초가 되며, 또한 방언과 신유, 예언의 은사만을 최고의 은사들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방언을 받아야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중생 이후 강력한 영적 체험으로 인해 제2의 축복으로 받은 증거라고 말하면서 사실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으로 구분 지어버렸고,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제2의 축복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냥 그리스도인으로 나뉘게 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했고(고전 4:6), 성령의 은사만을 자랑하면서 교만에 빠져있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했다.

 

오순절 신학은 성령의 은사에 지나친 강조를 두고 있다. 오순절교회에서는 은사위주의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고, 그래서 일부 극단적인 견해로서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자기중심적인 경험 세계를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그들이 믿고 있는 입장을 남에게 전수하려고 할 때 신비주의적 경향을 넘어서서 인본주의적인 아집에 빠지기도 한다. 이렇게 너무 지나치게 경험을 중요시 하는 경우에, 극단적으로는 성령의 사역을 인간적으로 남용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된다. 또 다른 경우에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보기 보다 어떤 힘, 에너지로 인식하게 되어 인격적인 관계임을 놓쳐버리게 된다.

 

오순절 성령세례의 경우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즉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사건이 더 이상 재현되지 않듯이 오순절 성령강림 역시 재현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정경이 형성되기 이전이었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두 번 더 등장하는 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도 특별한 하나님의 단회적 사건이라 생각한다.

 

성령의 세례는 성령께서 주시고자 작정하시고 원하시는 사람에게만 수여되는 선물이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를 받기 위해 어떤 인간적인 조건들이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미 소명을 받고, 중생한 자, 그리고 회심하여 신앙을 고백했으며,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자가 또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 중생을 얻을 수 없으며, 스스로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자가 없고, 스스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중생과 칭의를 받은 자는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은 자이며 오직 성령의 단독적 사역에 의해서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자력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다시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성령충만과 성령의 세례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성령의 세례는 회심 때에 발생하는 단회적 사건이지만 성령 충만은 성도의 생활에서 계속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미 오신 성령님을 다시 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잘못된 요청이다.

 

성령의 세례는 인간이 기도함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지만 성령의 충만은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임재하시는 성령의 응답적 사역이다. 성령의 전인격적인 지배를 받는 상태가 성령의 충만한 상태이다.

 

또한 제 3의 물결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마치 전 은사를 가장 풍성히 받은 롤모델로서 보는 견해에도 반대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은사를 받아서 사역을 하자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님의 인성을 너무 부각시킴으로 해서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신성이 드러날 부분을 인성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그룹의 특징으로 종말을 강조함으로 해서 부흥의 때를 단정해 버리는 약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오순절 신학과 제 3의 물결을 반대하지만 그들의 열심만은 우리가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해서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다고 확신하면서, 그와 동시에 기도가 영혼의 호흡으로서, 하나님과 계속해서 행해야할 영적 교제이고, 신앙생활의 필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순종함으로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24시간 365일을 교회에 모여 기도하려는 열정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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