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예증인 고린도교회(고전 1:26-31)
저는 그 동안 고린도전서를 읽을 때마다 1장에서 늘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교회에 있는 첫 번째 문제인 파당과 분열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세례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든요. "내가 너희 중에서 세례를 준 사람이 별로 없다." 이렇게 세례 이야기를 갑자기 꺼내면서, 또 십자가의 복음과 설교의 문제를 꺼내는 이유에 대해서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교회의 파당과 분열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세례의 이야기를 꺼내고, 설교의 이야기를 꺼내고,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서 사역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했을까 하는 거죠. 이번에 고린도전서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이제야 '아, 이 말씀을 꺼낸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조금 붙잡게 되었습니다.
분열과 파당의 중심에 사역자가 위치하게 된 이유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파당과 분열의 문제였는데, 그 핵심에는 교회의 말씀사역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혹은 바울, 혹은 아볼로, 혹은 베드로, 심지어는 예수님을 추종한다는 사람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거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교회에 파당을 만든 적도 없고, 아볼로도 그런 일을 부추긴 적도 없고, 베드로도 그런 일을 시도한 적이 없다는 거지요. 더군다나 예수님이라면 그런 일을 더더군다나 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바울 편에, 혹자는 아볼로 편에, 혹자는 베드로 편에, 혹자는 예수님 편에 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그런 일을 원하지도 않았고, 그런 일들을 조장하지도 않았고, 그런 파당을 만든 적도 없는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말씀사역자에 대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고, 말씀사역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데에는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복음에 대한 이해가 애초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교역자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말씀사역자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이분들이 행하는 대표적인 사역은 설교사역과 성례의 집행입니다. 그래서 교역자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말씀사역자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면 설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사역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그가 집행하는 성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세례가 사람들에게는 잘못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등록하면 등록카드를 작성할 때, '세례를 언제 받으셨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받으셨습니까?', '세례를 주신 집례자는 누구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언제 세례 받았더라?" 이러는 분들이 한 90퍼센트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은 시간과 장소를 정확하게 말하는 분들은 열 분 중 한 분 만나기도 어렵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분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좀 이해가 되요. 시간이 좀 흐르고 보니까 알던 것들도 어느 때에는 당황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이해는 되는데, 다만 평소에 이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마음에 늘 새기고 있다면 단번에 대답이 나오겠죠. 그런데 만약 세례 주신 목사님이 아주 유명한 분이면 사람들이 한 마디 하겠죠. 저도 제가 아는 목사님 같으면 한 마디 할 겁니다. "아 그래요? 000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으셨네요." 그러면서 유명한 목사님에게 받은 세례는 유명하지 않은 자그마한 교회의 목사님한테 받은 세례보다 좀 더 자랑할만한 재료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거죠. 가령 우리가 다 알만 한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아, 그러세요?" 이렇게 나올 거 아니에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린도교회는 그렇게 유명한 분들 몇 분이 관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유명한 분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의 어떤 모임이랄까, 혹은 계보랄까 하는 것이 생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생길 수 있다'가 아니라 고린도교회는 생겼다는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야, 나는 00한테 세례 받았어." "그래? 야, 그거 대단하구나!" 이렇게 나올 수 있는 분들이 지금 고린도교회와 연관이 되어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는 물론 직접 세례주신 적은 없고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인데 그냥 제자들이 한 일이라도 '예수님이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만, 어쨌든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은 이 사람들은 기독교의 1세대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가 있는 거지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과거 통일교가 제일 처음에 시작할 때 몇 가정이 함께 시작을 했는데, 결국 이 사람들이 통일교의 가장 핵심부, 가장 노른자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가정, 몇 가정, 몇 가정, 몇 가정... 이런 식으로 확장되다가 나중에는 몇 회째 합동결혼식의 멤버인가 하는 것들을 가지고 이 사람들이 지금 통일교의 핵심부냐 아니냐 하는 것들이 결정되거든요. 서울 어린이대공원 옆에 가면 '선화예고'라는 학교가 있는데, '리틀 엔젤스' 이게 그 학교 학생들로 이루어진 공연단체입니다. 그런데 제 후배 하나가 음악 하는 학생인데 그 선화예고를 다녔어요. 그런데 그 학교가 통일교 재단이잖아요. 이 친구는 우리 교회 학생이었고요. 그래서 우리 교회 학생이 통일교 재단 학교를 다니니까 아무래도 좀 껄끄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학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좀 물어봤더니, 거기는 통일교 핵심 간부들의 자녀들이 다 입학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그게 어느 정도의 신분이에요. 가령 통일교가 최초에 여덟 가정으로 시작되었다면, 최초의 여덟 가정, 그 다음 열 여섯 가정, 그 다음 서른 두 가정, 그 다음 예순 네 가정... 이런 식으로 숫자가 늘어나면서 핵심부에서 점점 멀어지는 거죠. 핵심부에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거든요. 교회 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AD 50년대 중반인데, 이미 예수님 승천하신 뒤로 한 이십여 년 흘러간 때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예수님 당시에 세례 받은 사람들도 살아있고, 사도들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그런 시대에 "나는 베드로에게 세례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되지요. 그러니까 이런 세례의 문제가 교회를 나누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거죠.
사역자와 그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
이건 세례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세례는 어떤 사람에게 받았느냐에 따라서 급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으니까 특별한 은혜의 역사가 있을 것이고, 무명한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별 볼일 없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세례는 어떤 한 사람 개인, 목사 개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 개인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면 유명한 목사님에게 세례 받은 것을 자랑할 수 있겠지요. 마치 유명인사에게 받은 사인을 자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세례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에요. 세례의 권위는 세례를 주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례가 정말 의미 있게 되는 것은 집례 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로 이 일들을 보게 되면 성부, 성자, 성령의 권세와 능력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사실을 앞세울 수 있다는 거죠.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께 받은 풍성한 은혜를 가지고 세상의 원리를 섬겼다는 데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원리가 무엇이냐면 인간의 것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것들을 높이는 것이지요. 즉 세상에서 가치 있게 여기고,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겁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였는데, 이 문제가 세례에서도 나타나고, 설교에서도 나타났다 하는 이야기예요. 누가 설교했느냐에 따라서 성도들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거죠. 어떤 설교자는 말을 아주 잘 꾸면서 사람들의 귀에 쏙 들어오도록 설교하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설교자는 말재주가 없어서 그저 더듬더듬 거리면서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사람들은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면 저 사람이 얼마나 유창하게 설교하느냐 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하는 거죠. 그래서 유창하게 설교하고, 또 그 목소리가 아주 호소력이 있으면 그 유창한 것과 호소력 있는 목소리 때문에 혹 하는 것입니다. 설교조차도, 이 설교 때문에 성도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문제로 갈라서는 일이 있게 되고, 그것 때문에 실상 사람들 사이에 좋고 나쁨으로 나누어지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가령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야 담임 목사 한 사람, 부목사 한 사람 이러니까 그럴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만, 좀 더 큰 교회, 부목사가 여러 명이 되는 큰 교회에서는 부목사님들 사이에도 은근히 이렇게 갈리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설교기회가 와서 부목사님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하면 성도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좋아하는 목사님들을 따라 나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분의 설교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저분의 설교를 좋아하는 거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목사들도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되는 겁니다. 저도 과거에 부목사들이 네 명씩 되는 교회들만 다니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목사님이 설교하시는데 성도들이 "아멘!" 이렇게 설교에 화답하면 은혜가 되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 은근히 신경이 쓰여요. '뭐 별로 잘 하지도 않은 설교인데 뭐 이렇게 아멘은 크게 해?' 이런 생각이 속에서 드는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가 설교할 때는 어떨까?' 이게 또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내가 설교할 때도 "아멘!" 하고 나오면 그제야 어느 정도 마음에 만족이 되요. '됐어! 그런데 저번 다른 목사님 때보다 아멘 소리가 좀 더 컸나?' 은근히 경쟁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들도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성도들의 마음이 이쪽으로 쏠리기도 하고 저쪽으로 쏠리기도 하는 일들이 있어요. 거기다가 담임 목사님과 부목사님, 이렇게 둘밖에 없는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 설교가 성도들 듣기에 썩 좋지 않고, 대신 젊은 부목사님이 아주 패기 있게 설교하면, "그냥 그 맛에 삽니다." 하는 이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담임 목사님 설교는 담임 목사님이니까 할 수 없이 듣는 것이고, 부목사님 설교가 최고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대적이 되는 거지만 이런 분들은 그 부목사님이 세상에서 설교를 제일 잘 하는 줄로 착각하지요. 그런데 그 분 설교가 상대적으로 조금 낫게 들리는 이유는 담임 목사님의 설교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 그렇게 드러나는 거잖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부목사님이 세상에서 제일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성도들이 착각을 하게 되요. 그리고 그러다가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이 부목사님을 중심으로 해서 교회를 분립해 나가는 일들도 가끔씩 일어난다는 거지요.
복음에 대한 이해가 사역자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미침
사역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해야 되는지, 사역자를 받아들일 때 어떤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되는지, 이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바로 이해했을 때에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 대하여 바르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사역에 대해서 바르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하, 그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세워졌고, 그가 행하는 설교는 그 사람의 재능, 혹은 그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 즉 '십자가의 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성도들도 설교를 들을 때에 초점을 거기에 맞추는 겁니다. 이분이 무슨 설교를 얼마나 매끄럽게 잘 하느냐, 이런 데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설교에서 전달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실패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역자를 볼 때, 목사님들을 보고, 사도들을 볼 때에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어요. 그 이유는 복음에 대해서 이해가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에도, '아, 저분이 설교를 매끄럽게 잘 하느냐, 수사법을 잘 쓰느냐, 웅변을 잘 하느냐, 목소리가 좋으냐, 그리고 그 외모가 반듯하냐' 이런 온갖 것들을 보면서 평가를 하는 거예요. 그가 전파하고 있는 십자가의 복음을 마음에 두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고 있는 외적인 것들에 마음을 쏟고 그것들을 자기의 취향을 따라서 추구해 나간다는 거지요. 사람들마다 취향이 있습니다. 문화, 경험, 혹은 학식과 같은 것들을 따라서 형성되는 어떤 자기의 관(觀)이 있어요. 그런데 그 관에 따라서 사역자들을 나름대로 판단하며, 이 사람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고, 저 사람은 저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교회 안에서 파벌로 형성되어 나갔다는 것, 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문제였던 거지요. 말씀 사역자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는 잘 알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할 것입니다만, 문제는 말씀 사역자에 대하여 잘못 이해를 했고, 말씀 사역자를 잘못 이해한 이유는 복음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말씀 사역자 개인과, 그 말씀 사역자가 행하는 사역, 즉 설교와 세례와 성찬이 오히려 분열의 원인을 제공했던 거죠. 이것은 사역자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사역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들을 보는 데 있어, 바르게 말씀을 깨우치지 못했고, 세상의 원리에 아직도 물들어 있는 사람들의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는 지금 이 문제들을 여기서 다루어나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 사역자를 볼 때,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지, 어떻게 그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되는지, 이것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 이 큰 원칙을 우리가 분명히 담고 고린도전서를 함께 살펴보면서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해야 된다는 거예요.
복음에 대한 이해가 사역자의 사역에 영향을 미침
사역자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아 이제 말씀 사역자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사역함에 있어 발전시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는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사역자들도 그 본래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들이 있다 그 얘기입니다. 그것이 항상 우리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에요. 성도들이나 말씀 사역자 모두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모 교회의 부목사로 있을 때, 그 교회는 부목사가 모두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담임 목사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부목사 네 명이서 3년 6개월 동안 후임 담임 목사님을 모시는데 그 때까지 함께 사역을 했죠. 목사님을 모시는데 굉장히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담임 목사님을 모신 후에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자기의 사역지를 찾아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이 함께 있는 3년 6개월 동안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네 명의 부목사가 4인 4색이었어요. 한 사람은 친절의 대명사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이었어요. 말투부터 나긋나긋해서, "아, 집사님 어서 오세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제가 그 분과 같이 서 있으면 저는 굉장히 무뚝뚝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그 목사님과 함께 똑같이 행동하면 성도들이 완전히 혼이 빠질 것 아니에요. 교회만 오면 목사님들이 막 달려들어서 그러면 어떡하겠어요? 그래서 저는 가만히 서 있다가 그냥 "안녕하세요?" 그러고 가만히 있으면 이 분은 특유의 그 부드러운 말투로 한 열 마디쯤 더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옆에 뻘쭘하게 서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너무너무 대조되어서 안 좋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목사님한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이 목사님, 정도껏 합시다. 너무 그렇게 하니까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성도들에게 '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 이렇게 몇 마디만 하고 말지, 그렇게 달라붙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옆에 있는 다른 사람 좀 생각해 주세요." 그랬는데 심각하게 듣는 것 같더니 그 다음 주 보니까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참다 참다가 또 한 번 얘기를 했는데, 또 심각하게 듣는 것 같더니 그 다음에 보니까 또 똑같아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아이고, 이거 내가 말하면 뭐하냐?' 이래 가지고 그 목사님한테 그 때부터 퉁명스럽게 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제가 회개합니다. 그 목사님하고 굉장히 친해요. 굉장히 친한데도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중에 혼자 속으로 정리했어요. '아, 이분은 천성이 그런 분인데 내가 그것을 따라가려고 하면 못 따라간다. 그러니까 이분은 원래 그런 분이니까 그렇게 하도록 놔두고,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문제에 신경 쓰지 말자.' 이렇게 정리하니까 조금 낫기는 낫습니다만, 같이 있는 동안에는 내내 그 문제 때문에 걸리는 거예요. 따로따로 서 있으면 몰라도 늘 함께 예배안내 서면서 그런 문제들이 떠오르는 거예요. 또 한 분은 참견을 안 하는 일이 없을 만큼 모든 일에 나서서 일을 하는 그런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속된 말로 하면 오지랖이 좀 넓은 분이고, 좋게 보면 자상해서 챙길 것 다 챙겨주는 분인 거죠. 그런데 그 분하고도 참 힘들었어요. 같이 있다 보니까 이 분은 내 일, 네 일 안 따지고 다 내 일인 겁니다. 그러니까 큰 교회는 교구들이 나눠져 있고, 각 교구에는 담당 목사가 있어서 자기 교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교구 목사가 주관하게 되는데, 이 분은 교구가 달라도 그냥 자기가 다 일을 챙기는 분인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들도 일 생기면 어느 교구든 다 뛰는 이분한테 일단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의 사정이 그 목사님에게 다 들어가요. 그러니까 담당 교구 목사는 내용도 모르는데 이분은 다 아는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이렇게 되니까 얼마나 일 진행하는데 어려운지, 그래서 불러가지고 또 같이 얘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일의 한계를 우리가 좀 따집시다. 교구가 있으면 한계를 정하고, 또 다른 일들도 한계도 정해서 일을 합시다." 그랬는데 안 되더라고요. 왜? 그게 그 분의 천성이에요. 이래 가지고서는 그 문제 역시 제가 또 혼자서 속으로 정리했어요. '내가 메모해 가면서 쫓아다녀도 못할 일을 저분은 본능적으로 다 해내는구나. 이건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고 그것 때문에 신경 쓰면 내가 오히려 안 좋아진다.' 그렇게 생각하고 정리를 했어요. 또 한 분은 설교를 잘 하는 분이에요. 아주 쉽게 그리고 핵심을 잘 짚어주면서 은혜롭게 설교하는 분이에요. 마지막 남은 저는 뭐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목사죠.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성도들은 좋아하더라고요. 왜냐하면 한 스타일의 목사님들이 아니라 네 분이 있는데 스타일이 다 달라요. 설교 스타일도 다르고, 일하는 스타일도 다르고, 성도들을 대하는 모습도 다르고, 다 다른데 성도들은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담임 목사님을 모시지 못하고 3년 6개월 지내는 동안에 성도들이 장로님들한테, "우리 이대로 가면 안 됩니까? 담임 목사님 모신다고 할 것 없이 지금 우리 부목사님들 네 분 모시고 우리끼리 지내면 안 됩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성도들이 다들 좋아하는 목사님들이 있는 거예요. 색깔이 뚜렷하다보니까 각각 좋아하는 목사님들이 있었어요. 우리끼리는 참 힘들었죠. 그런 속에서도 큰 잘못 없이 후임 목사님 모시고 모든 사역을 정리했던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인데, 어쨌든 그 동안 우리끼리는 굉장히 힘들었어요. 나중에는 다 극복을 해 내고 아주 친밀하게 관계들을 유지하고 지금도 서로들 연락하고 합니다.
사역의 본질을 분별해야 함
어쨌든 교회 안에서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사역자의 성격이라든지 스타일 때문에 성도들이 좋아하고 싫어하게 되는 문제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어떤 교역자가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생각과 취향 때문에 그분을 미워하고 싫어한다거나, 일방적으로 무조건 그 사람을 좋아하는 이런 자세를 가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기 때문이잖아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보내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분의 성격이 있다면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 분의 스타일이 있다면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내신 것은 실상 그 사람의 성격이나 스타일을 사용하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주신 복음을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목사님이 한 교회에 와서 사역하면 그 사람의 성격이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격도 어느 정도 교회 일에 작용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본질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스타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스타일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되요. 본질적인 것과 그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비본질적인 것이 있는데, 우리는 본질적인 것보다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비본질적인 것 때문에 누구는 싫어하고 누구는 좋아하는 식의 반응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그 속에 있는 '십자가의 도'라고 하는 본질을 우리는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함정에 빠졌던 거예요. 항상 본질보다는 본질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것을 강조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것들이죠. 영업사원들을 훈련시키는 훈련원에 가게 되면, 영업사원들 훈련시키는 강사들은 이 사람들 앞에 나설 때에는 자기의 진실된 모습이 아니라 여러 가지 연출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출의 핵심주제는 '성공'이에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고, 여러분은 나처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예요. 그래서 자신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가지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헤어스타일, 명품 옷, 넥타이 하나, 넥타이핀 하나 예사로운 것들이 아니죠. 최고급이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일류 브랜드의 것으로 다 갖춥니다. 시계도 '이거 어디서 산 몇 백 만 원짜리 시계입니다.' 하면서 금장시계 번쩍번쩍 하는 것을 딱 차고 나타나죠. 여기 손가락에는 세 돈, 네 돈 되는 두꺼운 금반지를 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그냥 안 보거든요. 다 봅니다. 이런 것들이 성공의,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인 거예요. 과시하는 거죠. 그리고 패기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람의 본심은 어디에 있어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영업의 자리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끌어들일 때, '이 일을 해서 여러분들이 얼마를 벌 수 있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그런 방식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나는 성공한 사람이고, 여러분도 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걸 강조하는 거죠. 겉으로 그렇게 포장을 아주 화려하게 해서 제시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곳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쏟기 보다는 '그걸 하면 저렇게 성공하는구나!'라고 하는 성공의 이미지를 마음 속에 가지고 거기에 빠져드는 거예요. 본질과 그 본질을 외적으로 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
과거 교회의 이천 년 역사 속에서 이 문제는 계속하여 갈등을 빚어오고, 교회 안에서 이 두 가지 가치가 항상 부대끼면서 지내왔던 거예요. 하나는 인간의 성공, 인간의 업적, 인간의 공로,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교회 안에 공존하면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인간의 업적과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높이는 것이 대세를 이루기도 했던 거예요. 과거에 종교개혁기에 마틴 루터는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대비하면서, 교회는 오로지 십자가의 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저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어요. '아니, 영광의 신학이라니? 하나님의 영광도 있고, 구원의 영광도 있고, 그리고 마지막 날의 영광도 있는데, 지상에 사는 성도들이 너무 패배주의에 빠지거나 해도 안 될 텐데, 영광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왜 거부하느냐?' 그런 생각을 가졌었죠.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보니까 영광의 신학이라는 말 앞에는 빠진 말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면 '인간의'라는 말이에요. 즉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이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불렀던 겁니다. 이건 뭐냐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거죠.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구원을 위한 선행을 행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내용을 가지고 있는 신학이 바로 '영광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었어요.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영광의 신학'이죠. 이것이 중세 카톨릭에서부터 오늘까지 면면히 흘러내려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을 높이고, 인간의 영성을 높이면서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나아가고자 하는 흐름은 그 내부에서 여러 갈래의 전통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 한 전통을 따르는 수도원에서는 인간의 영성을 최고조로 발휘하게 되면 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데, 인간의 영성을 최고로 발휘하게 만드는 일은 '묵상'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제가 오후예배 때에 묵상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이 수도원 전통에서 행하는 묵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잖습니까? 그 묵상은 인간의 이성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나아가게 되면 신과 합일의 경험을 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신과 내가 다른 것이 아닌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자리에 나아가는 방법이 묵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묵상에도 이 사람들이 말하는 단계가 있어요. 묵상으로부터 그 다음 단계인 관상으로 넘어가게 되면 신과 합일하면서, 이제는 신도 없고 나도 없고, 신은 나요 나는 또 신이 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는 거죠.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버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과 은혜를 배제하고, 인간의 능력으로 그런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수도원에서 면면하게 보존해왔었던 묵상의 전통인 거예요. 그 다음 인간의 선의와 선행의 능력을 믿는 쪽에서는 구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죠. 그쪽에서는 구제사업에 힘쓰는 겁니다. 그 내부에는 바로 그와 같은 전통이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쪽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써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길이에요. 이것은 '자연신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준하는 것들을 궁리해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이런 다양한 전통들이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이 뭐냐면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 개신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외양으로 성공을 강조하고, '할 수 있다'를 강조하는 기복신앙 같은 것들이 70년대, 80년대에 우리나라에 얼마나 유행을 했습니까? 그래서 그 때는 "I can in Jesus!"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던 것이죠. 그러면서 적극적인 사고, 구체적인 기도와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는 목사님이 성공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성공의 표상인 목사님들은 담임하는 교회의 건물부터 성공을 과시하는 모양으로 짓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크리스털 처치(Crystal Church)'를 만들었는데, 이 교회당은 건물 전체가 유리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전통적인 교회당의 모습을 벗어난 획기적인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이 크리스털 처치를 찾아 가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목사님이 성공의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와 같이 크게 성공한 목사님과 성공한 교회들을 열렬하게 추구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언제나 교회 안에서 복음의 핵심을 비켜가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되요. 사람들에게 성공을 보여주면서 정작 전해야 하는 십자가는 덤으로 딸려오게 하는 방식, 이것을 사도 바울이 크게 경계하고 있는 거예요. 성공을 보여주면서, 즉 인간의 아름다움, 그의 성공과 그의 탁월한 능력과 재능들을 보여주면서 십자가의 도는 거기에 곁다리로 함께 따라오게 하는 방식, 물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방법론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인간의 도움을 얻어서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힘 있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말, 수사법을 통해서 복음이 더 잘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업적을 통해서 복음이 더 능력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복음의 선포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인간의 말에 달려 있고 인간의 업적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복음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복음을 어떻게 인간의 것들을 사용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처럼 복음의 선포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말씀 선포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청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을 간구해야 합니다. "오 주님, 말씀을 선포하는 주의 종을 주의 능력으로 세워주시고 주님께서 지혜로 빛을 비추어 주시고 복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요 이것이 우리가 참되게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게 할지라도 실제 의지하는 것은 목사님의 언변이라면, 기도는 그렇게 할지라도 실제 의지하는 것은 목사님의 능수능란한 어떤 재능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가리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사도가 1장 17절에서 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말의 지혜를 의지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지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2장에서도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에요. 2장 1, 2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또 4, 5절 말씀을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인간의 연구와 고안물을 의지하는 것의 위험성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야 되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게 되어야 되요. 말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실제로 그가 날마다 연구하는 것은 사람들의 심리학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말과 행동이 다른 거예요. 심리학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현대의 독재자들이 하는 일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그들은 심리학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일에 대해서 사실 많은 연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것이 심리학이 크게 발달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홍보와 광고기법입니다. 이것도 역시 심리학 연구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효과적인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에요. 신앙의 세계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달려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믿고 추구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이용할까?' 그거 이미 연구가 굉장히 많이 되어 있습니다. 그 연구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사회 속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해도,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의지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들이 있거든요. 우리에게는 사회적으로 이미 만연되어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나타남으로 하려고 하는 이것은 지켜나가기가 굉장히 힘든 거예요. 오히려 앞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커뮤니케이션의 기법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아주 몰라서는 안 되죠. 그러나 그것을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알고,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있어서 대화를 아주 잘 이끌어가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들은 중요하지만,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이 수단을 사용하는 문제는 우리가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죠.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이런 문제들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는 게 너무 투박하다, 너무 지겹게 복음만 이야기 한다' 이런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부름 받은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다! 내가 사역자가 된 것은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에는 사람의 말과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며 말씀이 선포될 때에는 내가 어떤 기술을, 내가 어떤 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 속에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이 바르고 참되다고 하는 사실을 교회에게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의지하라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본질적인 문제인지에 대해서 이해해야 됩니다. 심리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읽고 사람들의 마음이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어떤 부담감을 주게 해서 가게 하는, 혹은 당근을 제시해서 가게 하는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들이 때로는 많이 생겨요. 왜냐하면 성도들이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따라오지 않을 때에는 그런 유혹이 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겁니다. '주님, 주님께서 역사하셔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압도적으로 이곳에 은혜를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영혼들이 변화되고 교회가 새로워져야 되겠습니다. 이 교회가 주의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더 엎드려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달려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은혜를 더 의지하고 더 갈망하는 데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어떻게 나가야 될지에 대해서 이런 것들을 좀 명확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세상에서 여러 가지 기법들이 발전되어서 누구나 다 혹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이 있긴 있습니다만,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 그리고 사역자도, 성도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만을 의지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참된 영적 원리인 것입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파당의 중심에 사역자가 위치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복음에 대한 이해가 사역자에 대한 이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4. '인간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학'에는 여러 갈래의 전통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또 그와 같은 것들이 개신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5. 복음과 복음의 선포가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말씀 선포자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6. 인간의 연구와 고안물을 의지할 것인가, 성령의 역사를 의지할 것인가?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의 풍조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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