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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고린도전서 1:26-31_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예증인 고린도교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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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예증인 고린도교회 (고전 1:26-31)

 

 

죄 많은 그리스도인(?)

한때 참 많이 불렀던 찬송입니다. 특별히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이 구절이 마음속에 얼마나, 얼마나 사무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찬송을 부를 때 그 부분을 얼마나 많이 반복해서 불렀는지 모릅니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불렀어요. 그 가사는 '내가 감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미이지만, 이 찬송을 부르면서 그런 두려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더욱 더 이 찬송을 불렀던 겁니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누가 보면 제가 무슨 엄청난 죄를 지은 사람처럼 생각할 그런 상황입니다. 전에 우리 아버지께서 어느 교회에 가서 일을 하셨는데, 당시 아버지는 안 믿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동안 일을 하시고 집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쟁이들은 뭔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는지..." 예수쟁이들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는지 교회 와서 매일 '용서해주세요.', '잘못했습니다.' 그런 말만 하더라는 거죠. 아무리 설명을 해드려야 이해하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저는 그냥 "그런 게 아니에요." 하고 그냥 넘어가려는데,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런 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맨날 와 가지고서는 눈물 흘리면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러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냐?"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깨닫는 우리의 진실된 모습이에요.

 

십자가로 말미암은 변화

사실 인간끼리 서로 길고 짧은 걸 대본다면 꿀릴 사람이 우리들 중에 어디 있겠어요? 내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인간끼리 서로 잰다면 꿀릴 게 어디 있겠으며, 내가 뭐 잘못한 일이 있겠어요? 물론 내가 지금까지 사는 동안 아무런 잘못이 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내가 밀릴 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우리에게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깨달아지면 전혀 달라지는 거예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랐을 때의 나는 잘못한 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 때 나는 잘나가던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나는 누구한테 지지 않는 자존심도 가지고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내 마음 속에 임하게 되었을 때, 그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악과 그 죄의 사악함과 비참함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엎드려서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험악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그만 마음이 녹아져서 무릎을 꿇고 굴복했던 것이지요. "오, 주님, 벌레만도 못한 이런 사람조차도 사랑하시고 벌레만도 못한 나를 구원하여주신 것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와 그 능력이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때, 나에게 있는 그 어떤 자랑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내 마음을 가득 사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 커요. 베푸신 사랑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내 것이라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십자가의 정신이 내 마음 속에 가득 채워져 있을 때에는 다른 성도들을 볼 때에도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럽고, 어쩌면 그렇게 마음 속에서 즐거움이 넘치는지 몰라요. 누군가가 잘못해도 그게 마음 속에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 사람이면 그럴 수 있는 거지. 나는 더 했던 사람이야.' 이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

과거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물론 사도 바울이 한때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지만, 그 후에 그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고 주님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고 희생했었던 모든 것들을 볼 때 그가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심한 자기비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진실된 심령이었어요. 그는 과거에 자신이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일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죄인 중 괴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회심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든지 그의 마음속에 늘 살아있는 정신, 그 십자가의 정신 때문에 그는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그의 마음속에 늘 살아있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죄인 됨과 그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늘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죄인 중 괴수라고 표현했던 거예요.

 

우리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이 37세 무렵에 그의 개인적인 간증문을 기록하게 되는데, 그 때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진술합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발전해왔다기보다는, 순결하고 거룩하게 변화되어왔다기보다는 점점 더 악하게 된 것같은 생각이 든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20세에 회심하여 그 때부터 순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결심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던 분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애쓰고 힘쓰고 노력해온지 16, 17년 세월이 흐른 다음에 그는 그렇게 고백했던 거예요. 실제 그의 삶이 그렇게 퇴보한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회심했을 때보다 더욱 더 거룩하게 발전되어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거룩하게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그는 더욱 더 죄에 대하여 예민한 감각을 가지게 된 것이에요. 이전에는 큰 죄도 예사롭게 생각했다면 이제는 자그마한 죄도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도달을 한 거지요. 더 거룩해졌기 때문이에요. 늘 그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가 하는 이야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한 분보다 나는 더 괴수다." 그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만큼 그의 마음속에 십자가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십자가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성도들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며, 나의 죄악에 대해서는 단호한 마음을 갖지만 성도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는 용납하고 포용하는 마음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이란 그런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평가를 내리지만,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은 연약해서 그런 것이지. 그럴 수 있어. 나는 그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이야.'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용납하고 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에요.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을 때 그 마음속에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 앞에서는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최고라고 여기는 자존심과 자만심, 모든 교만한 것들이 사라지게 됩니다.

 

갈보리 산 십자가 위에 영광의 주 죽으셨네

주가 지신 십자가 앞에 나의 자랑 다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의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모든 자랑을 그 앞에 다 버리는 겁입니다.

 

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더 이상 방황 없는 곳

헛된 세상, 썩어질 영광 십자가에 못 박으리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 눈 앞에 선명하게 보일 때, 그 때 자연스럽게 이러한 찬송과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앞에 가서 이 세상의 헛된 영광과 이 썩어질 모든 것들을 다 그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나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의지하며 살겠노라!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이며 십자가 신앙이에요.

 

십자가의 정신이 희미해지면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는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이 희미해졌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도들의 의식 속에서 정말 상실해버린 능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상실한 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십자가의 은혜가 마음속에 한 없이 한 없이 밀려들어올 때 가졌던 그 마음, '세상의 자랑과 세상의 영광을 다 버리고 이제부터는 오직 십자가만을 위해서, 이제부터는 오직 우리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했었던 그 마음들이 다 사라져버리고, 어느덧 버렸던 그 모든 것들을 교회의 제도와 조직과 형식으로 새롭게 옷을 입혀서 다시 소유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 바로 우리의 모습이에요. 버렸던 명예욕, 교회 안에서 새로운 옷으로 코팅을 해 서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버렸던 모든 자만심, 교회 안에서 새롭게 코팅해서 그대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겉의 코팅은 거룩하지요. 겉에 코팅된 건 영광스럽죠. 그러나 살짝 긁어보면 속에 있는 진짜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살짝만 긁으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던 사람이 살짝 긁으니까, "상처받았습니다. 시험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속에 있던 것들을 다 내놓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이 정말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이고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못 박아 버린 사람인지 의심스럽게 되는 것이지요. 명예를 추구하고 권세를 추구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저도 이것저것 다 버린다고 하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한 채 붙들고 살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십자가가 내 마음 속에서 늘 살아 역사하지 못하면 이런 것들이 불쑥불쑥 일어나면서 내 삶을 주장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열과 파당을 치료하는 십자가의 정신

왜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에 있는 분열과 파당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앞에 굴복하는 심령,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 앞에 녹아내린 심령이어야 분열과 파당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 분열과 파당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면 교회가 새로운 은혜와 능력 안에서 세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의 신분과 삶의 모습을 통해서 복음의 정신을 다시 한 번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알고 보면 가난한 사람들, 알고 보면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주 큰 부자들, 그리고 세상의 왕과 귀족, 그리고 방백들과 같이 높은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 중에 예수님 믿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전체 인구 비례로 볼 때 소수일 것이고, 그 소수 중에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또 소수일 것이니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을 따져보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고린도교회는 그래도 그 당시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나마 나은 곳이었습니다. 거기는 그래도 경제적으로 활성화가 되어있는 곳이었거든요. 농촌지역으로 조금만 가게 되면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은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60년대까지만 해도 '보릿고개'라는 게 있었잖습니까? 그 당시는 땅의 생산력이 굉장히 저조한 상태였어요. 그래서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들은 우리가 먹고 살기에 충분치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5월, 6월 보리타작을 하고 보리가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이 연명해 나아가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 보릿고개를 넘어가야 되는데 그 고개를 넘는 게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서 밖에 나가 나물 캐고, 또 자연적으로 열리는 산딸기와 같은 열매를 따 먹으러 다니지만 그런 것이 얼마나 있겠어요? 그러니 할 수 없이 소나무의 거친 겉껍질을 벗겨내고 그 속에 있는 그나마 부드러운 속살을 벗겨서 쪄 먹지만, 그래도 나무는 나무입니다. 아무리 부드럽다고 해도 먹기에는 좀 뻣뻣해요. 그런데 보릿고개 내내 그런 것 먹으면서 컸던 거예요. 그러니 사람들의 얼굴이 다 누렇게 뜨고 버짐이 허옇게 피고, 또 영양상태가 안 좋으니까 머리에 뻥뻥 구멍이 뚫려서 곪고 그랬어요. 그래서 옛날 분들 중에는 머리가 듬성듬성 빠져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아이들은 먹은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배만 불러요? 빼빼 말라서 갈비는 다 드러나 있는데 배만 툭 튀어 나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몸의 균형이 깨져버리는 것이죠. 우리나라도 1960년대까지 그랬어요. 왜? 땅의 생산력이 저조했거든요. 그래서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다 먹고 사는 것조차도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고, 또 병충해에 강하고 재래 벼보다 생산량이 월등히 많은 통일벼를 심으면서부터 비로소 보릿고개를 넘어서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 통일벼는 맛이 되게 없었다고 그래요. 저는 맛은 별로 기억에 없는데 그 당시 어른들은 맛이 없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어쨌든 통일벼를 심으면서 땅의 생산량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많아지게 된 거죠. 또 이 때 사용했던 비료도 그 이전에 썼던 비료보다 월등히 탁월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전까지는 우리나라도 수천 년 동안 그 보릿고개로 허덕이면서 살아왔었던 겁니다. 물론 천석꾼, 만석꾼 하는 부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천석꾼, 만석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각 도에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소수라 이거죠. 대다수는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2000년 전 당시 고린도교회 주변의 모든 곳이 그런 상황이었어요. 다만 고린도는 위치상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목에 위치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고 무역의 중심지가 되다 보니 그래도 제법 산다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제법 산다하는 그 사람들 역시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그렇게 거들먹거릴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도토리 키 재기하는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파당을 짓고 있느냐 이겁니다.

 

영혼의 싫증과 물림 상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구원은 실상 그렇게 비참한 인생들에게 임했던 겁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도 별 거 없는데 영적으로 보면 뭐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오히려 가지고 있다면 불의함과 원망과 불평과 모든 악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제는 그냥 예사로운 것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사실 우리는 이것을 가장 경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을 때에는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격하고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조급해하면서 말씀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처음의 그런 모습들이 사라지는 거지요. 그리고 늘 그렇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늘 그러려니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디 그게 늘 그러려니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럴 만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사롭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배불러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배부름은 실상 영혼의 참된 만족이 아닙니다. 이런 배부름은 영혼의 싫증과 물림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밥을 입에 떠 넣어 주면 그 아이는 이걸 몇 번 씹고는 뱉어냅니다. 혀로 무조건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는 "그러면 안 돼!" 하면서 뱉어내는 밥을 손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또 한 입 넣어주면 두세 번 씹다가 또 이걸 밀어내요. 그러면 밉죠. 약 오르죠.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그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그것들을 하나도 깨우치지 못한 채 입으로 두세 번 씹고서는 장난삼아 뱉어버리는 겁니다. 밥을 떠 넣어줬던 엄마는 그런 모습을 볼 때 속상하죠. 하지만 자기는 장난으로 입 밖으로 밀어내요. 하나님의 은혜도 장난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도 장난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르고, 그게 얼마나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모른 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비록 한 수저지만 그 밥을 마련하기 위해서 부모가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이 밥 한 술을 만들기 위해서 이 세상의 농부들은 어떻게 고생을 했으며, 이것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 한 수저 밥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봄부터 가을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베풀어주셨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사롭게 이것을 뱉어버리고 장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이렇게 배웠습니다. "밥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먹는 음식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안 먹으려면 그대로 놔둬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장난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먹고 힘을 얻고 능력을 얻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밥에 싫증내며 그것을 가지고 장난치고 어떻게 나오는지 반응을 보자 하는 식으로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하여 영적으로 참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싫증과 물림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인 싫증과 물림의 상태에 빠지게 되면 십자가의 정신은 그 속에서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한 그 모든 것들도 다 사라져버리고 대신 그 속에서 자기의 자아와 자존심과 같은 것들만 살아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교회

과거 어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왔습니다. "고마해라. 많이 묵읏다 아이가." 그런데 그 대사처럼, "십자가는 질렸다! 딴 것 좀 해라!" 이렇게 나오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싫증과 물림의 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영혼이 이렇게 피폐하게 되고, 그런 성도들이 많은 교회는 교회 자체가 영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혼의 상태 이상으로 설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줄 뿐입니다. 성도를 보면 교회를 아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아래 거하며 십자가의 정신이 그의 마음속에 늘 감동을 주고, 그래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하게 섬겨 나아가는 그런 교회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살아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 대하여 싫증을 내고 물리는 현상을 보여준다면 그 교회는 교회의 참된 은혜와 능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사도는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회복시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아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구원하시고 교회로 모으시지 않았느냐!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영혼들을 구원해주셨는데, 그렇게 구원받고 난 이후에 너희들은 무엇을 자랑해야 되겠느냐!" 도대체 무엇을 자랑해야 될까요? 31절 말씀 보면,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임한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임한 것은 우리로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랑함에 우리가 하나가 된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정신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을 아름답고 순결하게 세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을 때 어떠한 변화들이 나타납니까?

 

 

 

 

 

3.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 있을 때, 사도 바울과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는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또한 자신에게 그런 경험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4. 반대로 십자가의 정신이 희미해질 때 나타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5. '영혼의 싫증과 물림 상태'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6.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살아 있는 교회와 그것을 상실한 교회는 각각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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