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서 십자가의 중심성(고전 2:1-13)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말씀사역자에 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고
우리는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1장을 통해서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교회가 되었으나, 세상의 사고와 원리들을 버리지 못한 채 그 속에 빠져 있음으로 큰 문제를 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했습니다. 이 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교회 안에 파당과 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라고 하는 통일성을 깨뜨리는 아주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파당과 분열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데, 사도 바울은 그 원인을 고린도교회가 복음을 바로 깨닫지 못했고 아울러서 그 복음을 들고 사역하는 말씀 사역자들에 대하여 잘못 이해를 했기 때문에 말씀 사역자를 중심으로 오히려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사역자들 자신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일에 앞장선 것은 아닙니다. 바울 자신이 그런 일을 한 적도 없고, 베드로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볼로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추종하고,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를 추종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예수님을 추구한다"고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역자들은 분열을 시도한 적이 없는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저렇게 갈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사역자들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말씀 사역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그들이 평생의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 사역자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사역의 본질에 대하여 잘못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다시 설명하며 사역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설명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파당과 분열들을 일소하고 교회가 참된 교회를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설교 사역에서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지 아니함
사도는 이제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역자의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인 '설교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설교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1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설교에 있어서 인간의 말과 인간의 지혜, 혹은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말주변, 아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설교도 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런 일들을 사도 바울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논리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가 쓴 성경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굉장히 논리적인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 하나를 설명하더라도 왔다갔다 아무렇게나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개요를 세워놓고 그 개요에 따라서 치밀하게 논리를 전개해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지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성이 하나님의 형상의 한 모습입니다. 감성도 하나님의 형상의 한 모습이며, 의지도 하나님의 형상의 한 모습입니다. 도덕성도 하나님의 형상의 한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려면 논리적으로 전달해야 됩니다. 논리적이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왜 무슨 말인지 모릅니까? 논리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왔다갔다 하면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논리를 가지고 모든 사실들을 전달해야 됩니다. 다만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논리를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전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전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믿을 것이며, 논리적으로 전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변화될 것이라고 하는, 논리를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을 버렸다는 얘기입니다. 복음을 설명할 때 논리를 떠나서 아무렇게나 전하면 안 됩니다. 차분하게,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순서를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다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학식과 논리적인 훈련, 그리고 말재주와 같은 것들을 가지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의지하는 마음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리지 않기 위하여
왜 그것을 버렸을까요? 그것은 2절 말씀에 나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십자가를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말재주나 말주변을 의지하는 것, 그가 훈련받은 어떤 교육과 지성을 의지하는 것, 이것은 십자가를 오히려 가리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못하는 자로서 나는 십자가만을 전하겠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작정을 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작정했다'는 것은 그가 마음속에 어떤 특별한 깨달음이 있어서 결심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는 작정을 해야 했을까요? 혹자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동쪽으로 소아시아 지방을 지나서 인도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어찌할까 고민하는 중에 마게도냐, 즉 오늘날 그리스 북부와 세르비아 사이에 있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어떤 사람이 '이곳에 와서 우리를 좀 도와주시오'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 해를 건너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에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빌립보라고 하는 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 서쪽으로 쭉 내려오면서 데살로니가에서 또 복음을 전하게 되고 데살로니가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서 베뢰아에서 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베뢰아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가서 아덴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는데 여기가 오늘날 아테네입니다. 그리스의 수도가 되는 곳이지요. 그리고 아덴에서 다시 남쪽으로 가게 되면 고린도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린도에 오기 직전에 사도 바울은 아덴, 즉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가 아덴 곳곳을 돌아다녀보니 신전이 얼마나 많고 또 신상이 얼마나 많은지, 과거에 많이 파괴되었어도 오늘날 가 보면 아직도 그 자취들이 많이 남아있죠. 옛날에는 말할 수 없이 많았어요. 오죽하면 그 많은 신전과 신상 가운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하는 신상도 있었을까요. 알지 못하는 신까지도 어쩌면 친절하게 다 챙겨서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고 있었는지... 사도 바울이 사방을 다니면서 그 현장을 목격하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마음이 솟아올라왔어요. '천지를 지으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을 놓아두고 이렇게 엉뚱한 신을 섬기느라 사방에 신전도 세우고 신상도 세워놓았구나...' 가슴 속에서 막 북받쳐 오르는 것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광장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모든 마음을 잠시 눌러놓고 타오르는 심정과는 정반대로 아주 신사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테네 중심에 있는 광장으로, 사람들이 늘 모여서 이런저런 토론을 즐기고 또 자기 의견도 발표하고 듣고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특징은 새로운 사상을 듣기를 원하고 새로운 사상들을 즐기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이 낯선 사람이 와서 이제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겠거니 하고 많이 몰려왔던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거기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가 지금 아덴에 와서 돌아다녀보니 신전이 많이 있고 신상도 많은데, 여러분이 종교성이 풍부한 줄을 알겠습니다.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하는 신전과 신상까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알지 못하던 한 신을 소개합니다. 이 신은 세계를 창조한 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과 저는 그 분이 창조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우리는 동포입니다. 그러나 동포이며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각각 나라와 민족으로 나뉘어 살도록 하나님이 경계를 정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회개해야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정해서 심판할 날을 정해놓으셨습니다. 그 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인데 그 부활에 대하여는 분명한 증거가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던 거지요.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의 설교의 개요에 해당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우리에게 지금 전해지지 않죠. 개요가 이렇다 그 얘기입니다.
아덴에서의 설교에 대한 사도 바울의 평가
'제이 아담스'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는 과거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설교를 굉장히 크게 인정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주 훌륭한 모델이 되는 설교이다."라고 그 분은 그렇게 평가를 내렸어요. 왜냐하면 바로 십자가를 말하기 보다는 그 사람들과 어떤 공통점을 찾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대화의 공통주제를 찾아서 거기서부터 말씀을 풀어나갔다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성' - '신전과 우상들' - '알지 못하는 신' - '여호와 하나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 이렇게 보면 논리적으로 그 사람들과 어떤 접점을 찾아서 설교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제이 아담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커뮤니케이션을 훌륭하게 하고 있다. 설교는 커뮤니케이션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의 이 설교에 대해서 바울 자신은 어떻게 생각을 했을까요?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에 주목하였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작정을 했을까? 그것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있었던 경험이 반영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이것은 분명히 아덴에서의 경험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아덴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했으나 그는 거기에서는 그렇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몇 사람이 믿기는 했지만 아덴에 의미 있는 교회가 세워진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덴 다음에 방문했던 고린도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는 아가야 지방에서 첫 번째 교회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자신의 말씀 사역에 대해서 스스로 반성을 해볼 때, '아하 내가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오히려 둘러가는 방법으로 했었구나.' 그것을 본인이 반성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에 들어올 때는 '내가 십자가를 바로 전하고 그리고 십자가만을 전해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을 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저는 물론 전혀 생소한 분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분들과 접점을 찾아서 대화를 이끌어 나아가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결심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데, 어떠한 상황과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복음의 핵심을 선명하게 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일이 없었더라면, 그 곳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죗값을 대신 갚으시는 일이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 그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 있게 부르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믿는 자에게 의로움을 허락해주시는 것, 죄인이지만 너를 의롭다고 인정하실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전에는 원수가 되었고, 저주받은 자요,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어떻게 화목하게 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화목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어찌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겠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를 마지막 순간까지 구원하실 수 있겠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우리에게 영화로운 구원을 허락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이것들은 우리에게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겠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평소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가 어찌 상달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응답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푸시게 만드는 유일한 원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에게 그 무엇도 주어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너무나 깊이 깨우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과 홍해를 건너는 일, 그리고 광야 40년의 세월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 그 모든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은 복음의 핵심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요, 그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경의 모든 계시의 중심이며 핵심입니다. 성경계시는 한 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구속의 계시'입니다. 즉 멸망하는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역사 속에 실천해 나아가신 모든 구원의 행위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계시의 99% 이상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계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그 곳에 두시기까지의 과정이 창세기 1장과 2장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의 타락 장면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즉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구원의 길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는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역사적으로 성취되어 나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성경의 역사 전부를 구속사,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 때로부터 계속해서 구원의 복음을 통하여 저들을 구원하셨던 겁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후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울 것인데,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밟을 것이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여인의 후손'에 대한 계시가 타락한 인생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복음이 계시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구원의 복음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제하고는 복음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니 복음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 십자가를 선명하게 전해야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을 두루뭉술하게 전해서는 안 되겠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깨달음이었던 겁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을 주목하는 위험
그래서 고린도에 들어가면서 마음에 새롭게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여기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는 대목은 사도 바울에게 굉장히 걱정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그 걱정의 제목들이 4절 이하에 나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믿음이 생기고 믿게 되기를 원했지, 사람의 말과 사람의 지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했던 사람에게 마음이 모이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이 손가락으로, "자, 저기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라고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손가락을 보면서, "어, 반지를 꼈는데 금반지네요. 거기 보석이 박혀 있네요. 그거 너무너무 잘 만들었네요." 이렇게 이상하게 금반지에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사람들은 또한 손가락의 손톱을 봅니다. "야, 이거 손톱 어디서 관리를 하셨나요?" 지금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손가락을 통하여 십자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과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와 그리고 손톱을 보면서 "손톱관리를 잘 하셨는데 어느 집에 가서 이것을 관리했습니까? 거기에 칠한 매니큐어 색상이 예쁜데 그 색깔은 무슨 색깔입니까?" 이렇게 시작해서 반지도, "야, 이거 최신 유행하는 모델인데." 이러면서 엉뚱한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것을 바라볼까봐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고 떨었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바울과 베드로와 아볼로를 중심으로 갈려지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쏟지 아니하고, 그들이 전하는 십자가에 마음을 쏟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외모가 번듯합니다. 이 사람은 말을 잘합니다. 저 사람은 글을 잘 씁니다. 저 사람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온갖 것들을 사람들은 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 그가 지금 생명을 다해서 전파하는 십자가 이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였고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빠져 있는 함정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제가 여러분들 앞에 칭찬받을만한 일도 없고, 제가 여러분들 앞에 인정받아야 될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남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는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를 경시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다만 여기서는 그 사람이 전하는 메시지와 그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서 그 받은 바 계시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마음을 쏟아야 되는데, 주변적인 것에 마음을 쏟고, 주변적인 것 때문에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고, 그래서 이런 취향에 따라서 누구는 나랑 맞네, 안 맞네. 이런 식으로 하면서 갈리거나 떠나거나 하는 이런 일들 자체를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가지고 늘 문제를 삼고, 다른 것을 가지고 늘 서로 갈리고 떠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진리를 찾아서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진리 때문에,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 있고 바르게 선포되는 그 진리의 선포를 사모해서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교회를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진리예요. 그러나 지금은 진리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사람보다는 그 이외의 취향 때문에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입니다.
십자가가 가진 감화력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되는지 마음에 분명하게 세워놓고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가능케 했으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이었습니다. 아울러서 십자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십자가의 감화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성도들에게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착하게 사십시오." 이것은 도덕적인 교훈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감화력이 있을 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의 감화력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다 그냥 스러지고 맙니다. 왜 우리의 마음에 불평불만이 싹 트고 미움이 있고 질투가 있으며 영적인 생명력이 사라지는가? 이유를 따져보면 십자가의 감화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감화력이 있을 때에는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늘 샘솟듯이 솟아 나오는 것이에요. 십자가의 감화력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마음속에는 겸손이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감화력이 사라지고 나면 교만한 마음이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한 번 진단해 보십시오. 나에게 왜 은혜가 없으며, 나에게 왜 온유함이 사라지며, 나에게 왜 생명력이 사라지며, 나에게 왜 감사가 사라지는가? 마음속에서 십자가의 감화력이 점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감화력이 그리스도인들을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은 십자가의 감화력의 회복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의 능력은 십자가의 감화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실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력과 능력과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 마음속에 늘 살아서 역사하는 사람은 주님 앞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까 늘 염려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에서 큰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감화력이 사라지고 나면 신앙생활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는 것입니다. 주일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교회 한 번 빠졌다고 전화 연락은 왜 그렇게 득달같이 오는지, 이 사람이 전화하고 저 사람이 전화하고... 정말 힘들구나. 이런 경우가 벌어지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십자가의 감화력이 사라졌기 때문이에요.
주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은 십자가의 감화 때문입니다. 한없이 밀려드는 주의 은혜는 십자가의 감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을 빼 놓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존립할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마음을 쏟으십시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속에 능력 있게, 감화력으로 다가오도록 간절히 소망하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살고 우리의 삶이 사는 길입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또는 설교 사역을 할 때 '인간의 말과 인간의 지혜를 버렸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을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은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4. 복음을 전할 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분명한 결심은 무엇이며,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5. '구속의 계시'란 무엇입니까?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구속사'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6. 십자가의 감화력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야기해 봅시다.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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