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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독일종교개혁(A.D. 1517-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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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종교개혁(A.D. 1517-1648)

제1장 기본적 주제들

1. 근대사의 전환점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세기 기독교의 형성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점이 존재한다. 각각의 운동이 교회사 및 세속사에 미친 강력한 영향력도 그렇지만, 각 시대에 사용된 위대한 인물들이 그러하고, 각 시대 가운데 있었던 특별한 사건들과 사상적 경향들이 있었음을 볼 때 그 속에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각각의 운동들이 그 이전과 이후를 확연히 가르는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러한 시대를 뒤바꾸는 운동성을 위해 시대적으로 하나님의 철저한 준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개신교와 로마주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그 가지들은 다른 기독교의 서로 구별되는 두 형태를 제시한다. 가톨릭교회는 중세의 야만적인 민족들에게 꼭 필요한 훈련의 학교로서 공헌한 법적인 형태의 기독교로, 전통적, 위계제도적, 예전적, 보수적 성격을 띤다. 반면 개신교는 독립된 성년의 시대에 응답한 복음주의적 형태의 기독교로서 성서적, 민주적, 영적, 진보적 성격을 띤다. 전자가 '권위'의 원리에 의해, 후자는 '자유'의 원리에 의해 다스려진다. 그러나 양자를 연합시키고 있는 것은 양자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하고, 중요하다. 로마주의와 개신교는 공히 삼위일체 하나님, 신인양성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경과 보편적 신앙을 받아들이고,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들에 동의한다.

개신교는 죄와 은총에 관한 어거스틴의 교리를 되살리고 발전시켰는데,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의 주권성,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의 충족성, 칭의에 있어서 그리스도 공로의 완전성, 인간중보자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보좌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수도원 금욕주의를 사회적 도덕성으로, 이미지를 중요시하는 장엄한 예전주의를 단순하고 영적인 예배로 대체하였다.

한편, 독일과 스위스를 기점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잠시 동안은 교황 교회를 전복시킬 것처럼 승승장구하였으나, 16세기 말미에 이르러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은 로마교회가 강력하게 일어섬으로 이제는 두 교회가 어느 정도 세력의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두 교회는 서로를 억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한 일들에 있어서 고상한 경쟁자가 되도록 서로에게 자극을 주어야 할 것이다.

 

3. 종교개혁의 필요성

라틴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사실 라틴 교회 내부에서도 큰 문제였고, 나름대로 온건한 개혁을 통해 이 문제를 쇄신하려고 하는 몇 차례의 시도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다.

16세기 초 교회의 상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교황 및 성직제의 세속화: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교회는 분열되어 교황을 둘 혹은 셋 씩 두었던 시절이 있었고, 각 교황들의 도덕적 타락은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심지어는 복음 역사의 진리성을 의심했다고 여겨지는 교황도 존재했다.

성직 매매와 족벌주의는 거리낌 없이 시행되었으며, 성직자 독신제는 온갖 성적 타락의 근원이 되었다. 주교직은 자격과는 상관없이 왕자들과 귀족들의 가장 어린아이들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한 사람이 여러 성직을 갖고, 이로 인해 교구 부재는 비일비재한 일이 되어 버렸다.

2) 예배의 타락: 당시 신학은 스콜라주의적 공교함,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에 빠져 복음의 가르침은 무시되었다. 교육은 사제들과 귀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일반 평신도들에게 말씀을 접할 기회는 오직 강단에서 가르쳐지는 교훈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낯선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와 설교는 평신도뿐만 아니라 사제들 스스로에게도 올무가 되어 사제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뿐, 그 속에서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결국 말씀의 진리는 교회 내에서 무시되고, 그 자리는 여러 미신적인 의식과 예전들로 채워졌다.

3) 경건의 변질: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과 인격의 성화로부터 나와야 하는 경건은 외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여러 암송, 자선금 기부, 고해성사, 성지순례와 같은 기계적 행위들을 수행하는 것으로 축소되었고, 선행은 질보다는 양에 의해 측정되었으며, 보상이라는 이기적 동기에 호소하는 공로의 원리에 의해 오염되었다. 더욱이 죄의 용서를 돈을 주고 살 수 있었다.

 

4. 종교개혁을 위한 준비

종교개혁을 공부하는 가운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사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바탕 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교회를 벗어나서 교회를 개혁할 목적을 가진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교권의 지도자들에 의해 타의로 쫓겨난 자들이었다. 즉 종교개혁의 모든 준비는 오히려 로마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의 원리나 교리들 중에서 14세기와 15세기에 이미 예견되고 옹호되지 않은 것이라곤 거의 없다.

이렇게 가톨릭교회 안에서 준비된 발판에 폭력적 격정, 정치적 음모, 군주들의 야망과 탐욕,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동기들이 뒤섞여 결국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인간의 본성은 참혹하게 타락해 있으며, 역사 속에서 가장 고상한 운동들에조차 그 오점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은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동기를 가진 자들이었으며, 오늘날 그 열매를 통해 유익을 받지 않는 국가는 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5. 종교개혁의 정신과 목적

종교개혁자들은 영혼의 구원,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복음의 승리에 대해 지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보다 미래의 세계에 더 많이 생각했으며, 모든 정치적, 국가적, 학문적 관심을 종교에 대한 관심 아래 종속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현실을 외면한 수도사들이 아니라 현실의 최전선에서 몸으로 부딪친 사상가이자 행동가들이었다.

종교개혁은 교황 교회가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설치해 두었던 인간 중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복음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첫 원리들로 되돌아가는 원시 기독교의 부흥이자, 동시에 그때까지 알려진 어떤 이해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더 깊은 이해이고 적용이었다.

종교개혁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다. 전통에 대한 성경의 우위(객관적 원리), 행위에 대한 믿음의 우위(주관적 원리), 배타적 사제직에 대한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의 우위(사회적, 교회적 원리)가 그것이다. 이 세 원리는 복음적 자유 또는 그리스도 안의 자유라고 하는 하나의 원리로 귀속된다.

 

6. 성경의 권위

개신교의 객관적 원리는, 계시의 영감된 기록으로서의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하고 오류 없는 규범이라는 것이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경과 교회의 전통을 신앙의 공통의 규범이라고 주장하면서 대등하게 여기는 것을 이 원리는 반대한다. 물론 살아있는 교회의 가르침이 배척되는 것은 아니다. 단 하나님의 말씀 아래 종속되는 것이다.

성경의 원리를 적용함에 있어서 좀 더 보수적인 루터파와 성공회 종교개혁과, 좀 더 급진적인 츠빙글리파와 칼빈주의 종교개혁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보증이 없는 신앙의 조항들을 교회가 개인의 양심에 강요할 권리가 없다는 점에 원칙적으로 동의했다.

 

7. 믿음으로 의로워짐

개신교의 주관적 원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로워지고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이다. 이에 대하여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을 주장했으며, 칼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주장한다. 하지만 루터와 칼빈은 실제적으로 동일한 주장을 한 것이다.

개신교의 칭의론 교리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정의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것과 주로는 두 가지 점에서 상의하다. 칭의는 점진적 성장인 성화와는 달리 하나님의 선언적이고 사법적인 행위로 여겨지며, 믿음은 이론적 신앙이나 교회에 대한 맹목적 복종과는 달리 마음과 의지의 신뢰 행위로 여겨진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바울에게서 이끌어냈고, 로마주의자들은 주로 야고보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의미에 있어서 믿음은 은총의 자녀이고, 선행의 어머니이며, 모든 위대한 사상과 행위의 선구자라는 점에서 이 두 가지 사상이 다음과 같이 하나로 통합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8, 평신도 사제직

개신교의 사회적 또는 교회적 원리는 그리스도와 평신도 사이를 중보하는 특별한 사제직과는 구별되는 모든 신자들의 일반적 사제직이다. 로마 교회는 배타적인 위계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평신도에게는 수동적인 복종의 위치를 부여할 뿐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모든 신자는 성도, 사제, 그리고 왕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내주라는 가장 탁월한 기름부음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이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개혁자들은 평신도의 본래적 직위를 회복시켰다.

이 원리가 일관성 있게 수행된다면 평신도를 교회를 다스리고 이끌어 나가는데 적극적인 협력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며, 성도 각자에게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가지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평신도들 사이의 성경 지식의 확산, 대중적인 회중 찬양, 평신도 장로 제도, 도덕적 개혁과 일반 교육을 위한 관료들의 경건한 열망 등에서 나타난다.

 

9. 종교개혁과 합리주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과 전통을 판단하는 기준을 무오류적인 교회, 더 정확히는 무오류적인 교황이 지도하는 무오류적인 교회의 전통에 두고 있다. 반면 복음적 개신교는 단지 성경만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지만, 전통과 이성을 성경의 참된 의미를 확증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성경과 전통 위에 두고, 오직 이성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 안에 들어오는 한에 있어서만 이것들을 받아들인다.

종교개혁은 합리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가 양자에게 공히 합리주의의 어머니로 여겨졌지만, 실상 그 의미는 전혀 반대다. 합리주의는 종교개혁을 이성의 해방을 위한 첫 걸음으로 본 반면, 로마 가톨릭은 개신교가 현대의 모든 혁명과 불신앙 그 자체에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물론 종교개혁과 합리주의 사이에는 명백한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관계라는 것도 이성의 정당한 사용과 오용의 관계 정도에 불과하다.

1) 종교개혁이 이성을 일반적 원리로 사용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종교개혁은 교회의 무오류적 권위에 대해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던 로마 교회보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이성의 사용을 허용했다.

루터의 경우, 회의주의적, 합리주의적 경향의 인문주의 운동을 한때 이용하고자 했으나, 그의 강한 종교적 본성이 항상 그런 경향을 통제하였다. 그는 신조의 모든 조항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고 생각했으며, 여러 시련과 유혹 속에서 더욱 강하게 성경과 신앙을 붙잡았다. 노년에 그는 더욱 보수적인 목사가 되었는데, 내적인 말씀과 영이라는 신비적 교리를 배척하고, 성경에 기록된 문제에 대한 복종을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명석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신비적 기질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으며, 도리어 건전하고 냉정하고 실제적인 상식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성경의 가장 명백한 의미를 선호했다. 그럼에도 그는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신적 권위 앞에는 경외하는 마음을 품었으며, 이성을 그 위에 두고자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요 주석가였다. 그는 이성을 반드시 필요한 계시의 하녀라는 직분으로 인정하였다. 그는 논리적 천재성으로 개신교 정통주의의 가장 엄격한 체계를 구축했다.

2) 자유로운 탐구의 원리를 성경에 적용하는 문제

로마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외경을 포함한 정경을 확정했지만, 그것은 어떤 비판적인 탐구나 명확한 신학적 원리 없이, 단지 전통적 관습을 재확인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그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정경의 범위에 대해 다시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정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정경과 외경을 구별했으며, 신약의 "호모로구메나"와 "안티레고메나"의 구별 역시 부활시켰다. 또한 그들은 정경성의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외적 증거보다 내적 증거를 더욱 중요하게 제시하였다.

루터는 이신칭의의 중심교리를 정경성의 기준으로 삼음으로, 개신교의 내용적 또는 주관적 원리를 형식적 또는 객관적 원리 위에 두었다. 이런 원리 속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성경들을 구별하여 덜 중요한 성경을 뒤에 배치하였다. 영감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강하고 자유로운 것이었다. 성경의 신적 내용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루터는 계시된 진리 그 자체와 저자의 인간적 언어와 추론을 구별하였다.

츠빙글리는 단지 요한계시록만을 반대했다. 그는 계시록으로부터 어떤 교리적 가르침도 끌어내지 않았는데, 그것을 영감된 책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사도 요한 저작설 역시 부정했다.

칼빈은 야고보서와 유다서에 대해 아무런 비판을 가하지 않았으며, 종종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인정하면서 인용하기도 했지만, 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다. 특별히 칼빈은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확증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견해는 어거스틴의 견해와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견해는 서로 보완적인 것인데, 전통이라는 인간적 권위는 신앙의 궁극적 근거는 아니라 할지라도 진정성과 정경성에 관한 역사적 증거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합리주의와는 달리 커다란 비중을 갖는다.

3) "영감과 정경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자유로운 견해는 16세기 중반 이후로 포기되었으며, 간명하고도 견고한 신학체계가 뒤이어 나타나게 되었다. 17세기의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교부들의 신학을 체계화하고 축소시킨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주의를 그 장점과 결점 양자 모두에 있어서 흡사하게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반면, 후자는 교회의 전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루터파와 칼빈파 신학자들은 무오류의 교황에 반대하여 무오류의 성경을 정립시키기 위해 완고하고 기계적인 영감 이론을 정교하게 세우기에 이르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되었으며, 성령의 대필자로서 성경 저자들에게 구술된 것이었다. 심지어는 문체의 고전적인 순수성과 마소라 본문의 구두점까지 포함한 전통적인 텍스트의 완전성이 주장되었다. 본문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드러나게 된 명백한 사실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성경의 신적 측면만이 배타적으로 강조되고,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측면은 무시되거나 실제로는 부정되었다. 개신교 스콜라주의 시대의 주석적 빈곤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4) 합리주의가 정당한 항의로 제기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개신교의 성경광신과 신조광신에 반대해서였다. 하지만 합리주의는 교리, 성경, 교회법을 탐구적인 비판 아래 종속시켰으며, 성경의 신적 영감을 부인했다. 그러나 좀 더 후기에 이르러 합리주의는 정경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유리한 여러 발견들에 의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합리주의는 성경 언어학, 본문 비평, 문법적-역사적 주석에 귀중한 공헌을 지금도 하고 있다.

5) 이러한 주석적, 역사적 신학의 획득은 항구적인 유익이며, 이러한 요소들은 새로운 복음주의 신학에 통합되었다. 복음주의 신학은 합리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계시의 신적 사실들과 구원의 교리에 대한 적극적인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다. "비평과 합리주의적 사변이 잠깐 동안은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방황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사와 인간의 삶의 문제들에 유일한 해결의 열쇠를 제공하시는 그분에게로 궁극적으로는 돌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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