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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되는 십자가_(고전 2: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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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되는 십자가_(고전 2:14-3:3)

 

하나님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의 충돌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두 가지 방법이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갈등을 빚으며 충돌해왔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고,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의 말과 지혜로써 이 진리를 설명할 수 있고, 사람들이 알고 믿을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하는 견해와,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령한 것들을 깨우치는 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에 달려있다고 하는 견해가 항상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는 이런 충돌 속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진리를 선포하며 가르치고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으로 진리를 깨우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쪽이 교회 안에서 다수를 이루었다기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쪽이 다수였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느냐하면 사람들에게 신령한 것보다는 육신적인 것들이 더 쉽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늘 접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의 힘과 인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세상 속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던 것이지요. 이제부터 그의 생각과 그의 말과 그의 행동을 다스리는 원리는 거룩한 원리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원리는 이제 더 이상 자신과 상관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서 익숙하게 알고 있던 것들, 세상에서 자기들이 이제까지 추구해왔었던 모든 것들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생각의 원리가 되었고, 사람과 일을 판단하는 원리가 되었고, 자기의 행동을 결정짓는 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더 깊이 깨달아 알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거룩한 원리가 그의 생각을 새롭게 형성하고, 그래서 새롭게 된 그 지식을 따라서 그의 가치관과 인생관, 삶의 원리가 바뀌어야 했지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바뀌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신령한 사람에 대한 오해

본문에서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여기 '신령한 자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령에 사로잡혀서 성령의 희한한 능력들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이하의 말씀을 보게 되면,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넘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한다든지, 예언을 한다든지, 신유를 한다든지, 축사를 한다든지 하면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고, 방언 통역도 하는 많은 은사들이 있었고,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아니면 인간이 행하기에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어떤 종교적인 수행을 쌓은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가령 금욕의 삶을 장기간에 걸쳐서 살았던 사람이라든지, 어떤 특별한 고행의 길을 걸었던 사람을 신령한 사람으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과거에는 그런 수행의 전통들을 가지고 수행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있어요. 불교에서도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과거에 어떤 사람은 면벽 10년에 도를 깨우쳤더라 하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면벽 10년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벽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식사도 우리처럼 정식으로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거친 음식, 생식과 같은 것을 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면 엄청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는 거예요. 간혹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계룡산에서 10년간 도를 닦다가...' 계룡산에서 수행을 했다는 것이예요. 그래서 폭포 밑에 가서 옷을 다 벗고 폭포수 떨어지는 속에 앉아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충격을 온몸으로 그대로 받는 등, 이런 식으로 수행을 쌓기도 하는 거죠. 인간으로서는 행하기에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고행이나 금욕을 행한 사람을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진리의 사람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신령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령께서 진리를 가지고 자기 백성 가운데서 역사하실 때 성령께서 진리로써 역사하시는 일, 즉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진리를 깨우치고, 그 진리로 생각을 바르게 정돈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신령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우리는 신령하다고 하면 뭔가에 사로잡혀서 어떤 종교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것들을 신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신령한 지식을 소유하고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지식은 신령한 지식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입니다. 즉 지난 주에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령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그 말씀을 진심으로 배우고, 성령께서 그 마음속에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 그 깨달은 바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성령께서 말씀의 가르침을 통하여 명하신 것들을 진정으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사람, 이와 같은 사람을 가리켜서 신령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렇게 대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진리가 확립되지 못한 육적인 사람

그러면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말할 수 없었으면 어떻게 말했다는 이야기입니까?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초기의 어린 신자들이었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렀고 이제 교회는 안정적으로 조직이 되었고 성도들이 교회 여러 중직을 맡아서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다면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교인 중의 일부 어떤 사람은 이럴 수 있지만, 교회 전체적으로는 신령한 성도들이 교회의 대다수를 이루고, 그리하여 교회 전체가 신령하게 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대할 때에 이렇게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2절에,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젖을 먹는 것은 어린 아이일 때는 당연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일 때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발달단계에 따라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했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도 못하리라." 즉 지금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즉 진리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 진리의 풍성한 것들로 그의 생각을 정돈하지 못하고, 생각하는 원리, 말하는 원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 교회를 섬기는 원리가 진리로 확립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진리가 이것을 세워놓지 못하기 때문에, 이전에 진리를 모르던 때에 익숙하게 행하던 원리들을 가지고 교회 일을 판단하고 성도들을 판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자기 한 몸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지요. '안목의 정욕', 이것은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혹은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이런 생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어떤 것들을 대단하게 자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명예욕이나 권세욕과 같은 것들이겠죠. 우리는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집안에는 누구가 있고..." 이런 이야기들이죠. "과거에 우리는 어땠었고 우리 집안에 누구가 있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사돈의 팔촌까지, 사돈의 팔촌이면 무엇이란 이야기입니까? 남이란 이야기입니다. 사돈의 팔촌은 남이에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되었다고 해도 대단하게 생각을 하고 자랑을 합니다. 이것이 생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내 속에서 삶의 원리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모습이에요. 이렇게 이 세상의 원리가 여전히 그 마음속에 작용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3장 1절부터 한 번 봅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절에는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옵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했다는 증거는 무엇이냐 하면,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먹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

이러한 사실은 아직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말씀 사역자에 대하여 바르게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 사역자를 볼 때에도 항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이라고 하는 판단기준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며, 이것을 가지고 사역자들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가까이하고, 멀리하고 하는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편 가름을 하고 분열과 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고집하고 있는 한, 진리를 가지고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복음을 더 깊이 깨우치지 못하고 진리의 심오한 자리에 나아가지를 못하게 되었던 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여전히 젖을 먹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벌써 밥을 먹어야 하는데 아직도 젖을 먹고 있습니다. 젖을 먹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건 어린 아이 때나 유익한 것이지요. 최근 모유수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기를 처음 낳았을 때 어머니에게서 처음 나오는 젖을 먹여야 아이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아주 머리가 좋은 탁월한 아이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걱정을 했습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에게 초유(初乳)를 먹여야 된다던데' 하며 초유를 먹이기 로 결심을 단단히 했습니다. 초유 먹여야 아이가 제대로 큰다니 먹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엄마는 젖이 잘 나와서 수월하게 초유를 먹이는데, 어떤 엄마는 젖이 안 나와서 못 먹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할 수 없지요. 분유를 먹여야지요. 그러면 '초유를 제대로 못 먹였으니 아이가 제대로 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모유에 대해서 지나치게 강조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사실 모유는 아이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처음 몇 개월만 유익하지, 그 몇 개월 넘어가면 아이에게 영양이 안 됩니다. 모유가 담고 있는 영양은 영양학적으로 볼 때에는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처음 태어난 아기의 연약한 상태에 맞춰져 있어요. 몸의 기능과 모든 것들이 아직 활발하지 않을 때 그 연약한 상태에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조금만 크고 몸의 움직임이 좀 더 많아지게 되면 이제 더 이상 모유를 가지고는 아이에게 정상적인 영양을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젖을 떼고 이유식을 하면서 정상적으로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돌 될 때까지 엄마 젖만 먹여보세요. 그 아이 제대로 크지 않습니다. 돌 될 때까지 '엄마 젖을 먹이는 것이 엄마의 신성한 사명이다' 이러면서 모유만 먹게 해 보세요. 아이가 제대로 크겠습니까? 어린 시절에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면 그의 신체발달, 즉 뇌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계속해서 모유를 먹더라도 나중에는 이것이 버릇이라서 먹는 것이지, 몸에 유익이 되어서 먹는 게 아닙니다. 몸에 유익하기 위해서는 모유가 아닌 밥을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버릇처럼 엄마 젖을 입에 물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안에서 몇 대 독자 이런 아들들, 혹은 늦게 낳은 늦둥이와 같은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교 들어가서 3학년, 4학년 되기까지 엄마 젖 먹고 컸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영양이 충분해서 엄마 젖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버릇 일뿐입니다.

 

자신의 특권을 위하여 분쟁함

그런데 영적으로 버릇처럼 엄마 젖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벌써 성장을 했고, 벌써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해야 되는 때가 되었는데 여전히 엄마 젖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사도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볼 때에는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세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분유를 담은 젖병을 입에 늘 물고 다니면서 아이들한테, "자 여러분, 오늘은 몇 페이지죠? 진도 어디 나가야 될까요?" 이러면서 가르쳐 나간다면 학생들이 뭐라고 보겠습니까? 학생들이 뭐라고 보겠어요? 그런데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젖만 달라고 합니다. 여전히 자기를 애기 취급해 달라고 합니다. 즉 자기가 도달해야 되는 자리에는 도달하지 아니하고 특권만 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장에 따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하는 분명한 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이루지 아니하면서 자기 자신을 특별대우 해 달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집안에서 특별대우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특권이에요. 그러나 동생이 생기면 동생에게 양보해야지요. 이 아이는 그것이 싫어서 동생에게 해코지를 합니다. 엄마 안 보는 사이에 동생을 콱 꼬집습니다. 엄마가 잠깐 한 눈을 팔았는데 그 사이 아기 얼굴 여기가 뻘겋게 되어 있고 여기 이렇게 찢겨있고 그럽니다. 알고 보면 형이 동생을 해코지 한 것입니다. 크면 자기의 성장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아직 그렇게 못 하지요. 그러니까 자기 동생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인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3절에,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이것은 성장을 하여 마땅히 그의 걸맞은 모습을 보여야 할 터인데 여전히 어린 아이로 머물며 자기의 특권만을 주장하느라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성장하기를 원한다

부모님들은 모두 동일하게 자녀가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가, "아버지, 어머니, 제가 이번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처음 아르바이트 비를 받았습니다." 하면서 선물을 마련해준 거예요. 엄마한테는 시계, 아빠한테는 넥타이를 예쁘게 포장하여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 친구 목사님 집의 큰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 선물을, 아주 비싼 것을 준비해서 갖다가 드렸대요. 이래서 저한테 자랑을 했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다가 뭐라고 그랬죠. "아니 그 녀석은 공부해야 할 때 공부는 안 하고 무슨 아르바이트냐? 공부하는데 매진을 해야지 무슨 아르바이트냐? 아르바이트해서 돈 쓰는 것이 뭐 그게 좋아서 그러냐?"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굉장히 낙심을 하면서 저한테 뭐라고 합니다. "아니 목사님, 아이가 이렇게 했으면 그것이 얼마나 기특한 것인데요? 그런데 목사님은 왜 아이한테 그렇게 이야기하세요?" 굉장히 친한 분인데 아주 정색을 하고 말씀을 해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모 입장하고 옆에서 보는 사람 입장하고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어느 날 훌쩍 커서 "우리 엄마, 이거!" 하면서 선물을 예쁘게 포장해서 갖다 주고, "우리 아빠!" 하면서 선물을 가져다 줘서 마음이 굉장히 흐뭇했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같이 기뻐해줘야 되는데 저는 뭣도 모르고 막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과를 했어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네요." 그랬더니 그제야 풀립니다. 부모 마음이 그렇습니다. '아이가 어느덧 이렇게 컸구나'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겠어요? 언제까지나 어린 아이로 생각 했고, 언제까지나 부모 슬하에서 돌봐줘야 할 줄 생각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가 의젓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엄마도 이해하고, 아빠도 이해하고, 엄마 아빠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엄마 아빠를 오히려 위로해줄 때, 부모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기쁨이 몰려들겠어요? 부모의 심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이렇게 성장을 해서 어느 날 성장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 기쁨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아, 이제 얘는 다 컸구나.' 이렇게 아이를 키우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어요? 날마다 걱정하고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면서 얼마나 애썼습니까? 행여 아이가 뭐 하나 사달라고 하는데 못 사주면 어떡합니까? 아이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지원해주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그렇게 말할 수 없이 마음 쓰고 고생하면서 아이를 키워왔던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다 컸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비록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부모님 입장에서 하실 수 있는 대로는 최선을 다하셨다는 것을 제가 잘 압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그 동안의 고생, 그 동안의 아픔 다 잊어버릴 거 아니겠습니까?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는데 자녀들이 성장해서 그 한 마디를 하게 되면 정말 천 냥 빚뿐만 아니라 만 냥 빚도 갚는 것입니다.

 

진리가 탁월하고 영광스럽고 심오하게 임할 수 없다

자녀는 성장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젖 먹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지요. 아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여전히 부모님에게 기대고 살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캥거루족'이라고 부릅니다. 캥거루는 배에 주머니가 달려 있잖아요. 거기에 새끼를 넣고 다니면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끼가 서른다섯 살이 되도록 내내 엄마 주머니 속에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을 영적으로 한 번 생각 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캥거루족이 되어서 매일 구역장 주머니 속에서만 살고, 권찰 주머니 속에서만 살고, 목사님 주머니 속에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고린도교회가 바로 그런 상황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장성하지 못하여 밥을 정상적으로 먹고 소화해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가 그에게 탁월하고 영광스럽고 심오하게 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도 말합니다.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먼저 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고, 참 예쁘네요. 까꿍!" 이렇게 아이들에게만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른 살이 된 사람에게도 그렇게 한다면 정상이 아니겠죠. 그런데 서른 살이 된 사람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더 정상이 아닙니다. 남이 그렇게 하더라도 나는 이제 다 컸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오히려 어딜 가든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그것이 정상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진리가 제대로 가르쳐질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5장에 히브리서 기자가,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제가 그 부분을 읽을 때에 마음이 심히 안타까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멜기세덱에 관하여 더 깊은 진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것이 둔하므로 말하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 분들만 못 들었으면 상관이 없는데, 그 때문에 오늘 우리도 못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안타까웠습니다.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분에 대하여 더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게 아니라, 이 분을 통하여 계시된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중단된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역사적인 사실을 조금 더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즉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대제사장직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하여 더 밝혀지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더욱 더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데, 멜기세덱에 대하여 더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깊은 진리가 중단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어디 멜기세덱에 대하여 뿐이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신 것을 보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서도 드러나지 않은 진리, 말할 수 없었던 심오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오늘 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여전히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다면, 그래서 젖병을 물고 언제든지 어린 아이처럼 대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가 영광스럽게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가운데에서 성령께서 진리를 가지고 신령하게 역사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해하지 못하며, 어린 아이와 같이 말씀 사역자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며, 어린 아이와 같이 복음의 심오한 진리 가운데로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들, 그들은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하면서, 혹은 어린 아이로 특권을 유지하기를 위하여 동생을 해코지 하는 아이처럼 그렇게 서로 시기하며 분쟁하는 것이지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바로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역사한다면 희한한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과 예언과 혹은 병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에 집중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즉 진리를 가지고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쏟아야 되는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의 은사들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진리로 역사하는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에서,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 선생이 되지 못하였다, 세월은 흘러갔으나 선생이 되지를 못한다면 이는 교회의 큰 불행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영적인 지진(遲進)의 문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일 때에도 교회에게는 큰 짐인데, 이것이 온 교회의 문제라면 이는 교회에 말할 수 없는 수치요,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실 때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듣고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깨우치고자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말씀이 속에서 역사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이 변하고 우리의 삶이 진리로 새롭게 정리가 될 때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곳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로 자기 백성들을 가르쳐 나아가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행하시는 거예요. 진리로 나를 가르치시고 진리를 깨우치게 하옵소서. 진리로 나의 생각을 정돈하시고 진리로 나의 말을 깨끗케 하시고 진리로 나의 발길을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로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성령께 순종하고 진리를 삶에 이루어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교회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원리'와 '세상의 원리'가 늘 갈등을 빚어 왔는데, 이 가운데 세상의 원리를 따르는 쪽이 다수였던 사실(이유)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한 사람'이란 누구입니까?

 

 

 

 

 

4. 반대로 '육적인 사람'은 누구입니까? 또한 육적인 사람을 다르게 표현하는 말들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육적인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5.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에 머물러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6.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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