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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고린도전서설교] 세상 속에 있는 교회①_고전 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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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 있는 교회①(고전 5:9-10)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의 의식과 제도가 아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교회 안에 있는 음행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면서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쳤는데, 그 거룩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의 거룩함'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추상적인 단체나 제도, 혹은 교회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정적인 절차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아니면 교회 안에서 예배하거나 기도하는 종교의식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함이란 건물과 공간과 제도와 조직과 행정 혹은 종교의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고 그곳에 모이는 우리 모든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는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함을 우리들이 또 다시 교회의 의식과 제도 속으로만 몰아넣는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의 삶에서 항상 물러나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일만 힘쓰는 것은 교회의 거룩함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교회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여기 '너희에게 쓴 것'이란 고린도전서보다 앞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썼던 편지가 있는데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를 잘 읽어보면, 고린도전서보다 앞에 쓴 편지, 그리고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또 다른 사도 바울의 편지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최소한 네 번 편지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 수중에 남아있는 것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두 개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최소한 네 번을 보냈다고 되어 있는데 잃어버린 이 두 번의 편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건 할 수 없는 겁니다. 잃어버린 두 개의 편지가 혹시 어느 때인가 고고학 발견에 의해서 발굴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 주님께서 처음부터 성경으로 보존하셔서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인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보다 앞선, 혹은 고린도후서와 고린도전서 사이의 사도 바울의 편지라고 하는 것이 혹시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교훈 전체에 비추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는 것이지요. 그것 때문에 교리가 바뀌고, 그것 때문에 복음이 바뀌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의 충분한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알아야 할 것들, 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완전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계시가 추가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이전에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편지에서 음행에 대한 교훈을 준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그런데 먼저 쓴 편지를 읽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는 '음행하는 자와는 사귀지 말라'는 이 말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로 생각했다는 거죠. 예를 들면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해서 "음행하는 자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음행하는 자에 대하여는 눈을 감고 세상에서 우상 숭배하는 모든 불신자들을 음행하는 자로 여기고 그들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본래 의도를 곡해하는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질문으로 전달되었고 사도 바울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아하! 이 말씀을 오해했구나...' 말씀을 오해해서 교회 안에 있는 음행한 자들을 내보내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래서 그 일로 인해 난감해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을 두고, 이제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한 겁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교회는 세상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거죠. 그들과 사귀지 않으려면 교회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인데 교회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상 숭배하고 토색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어디에서? 세상에서. 세상에서는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없죠. 교회 안에서는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어요. 세상에서는 함께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했어야 되는 거죠.

 

설교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그런데 말씀을 듣고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하는 거예요. 사도의 편지를 잘못 이해하고 엉뚱한 쪽으로 적용해 나아가는 일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은 오죽하겠습니까? 인간과 인간이 말을 통해서 그 뜻을 바로 전달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서로 대화를 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종종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경험들을 우리는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말을 했는데 상대방이, "어, 그렇단 말이지!"하고 나오면, "그게 아닌데 사실은..." 하면서 말을 해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부부로 10년, 20년, 30년을 살았는데 그래도 어떨 때에는 오해가 생기는 거예요. "아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니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고 내 말뜻은..." 그렇게 설명을 하면 납득하느냐 하면 납득하지 않죠. 설명을 들어도 마음 한쪽 구석에는 납득이 안 되고 감정이 풀리지 않는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건 변명이다... 그건 변명일 뿐이고 당신 마음이 이렇게 드러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답답하죠?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부부 사이에도 말이란 제대로 전달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설교는 더더군다나 어려운 것이에요.

 

설교가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우리나라 말로 진행되는 말이지만 그 이야기의 주제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배경을 모르고 그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경제학자들이 나와서 최근 일어나는 경제현상들에 대하여 전문용어를 써 가며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그 이야기를 들을 때에 좋다는 말인지 나쁘다는 말인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요구하는 것이 "결론만 말해주세요." 이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좋아진다는 겁니까, 나빠진다는 겁니까? 좋아지면 언제 좋아진다는 겁니까?" 이것만 말해달라는 거지요. 복잡하게 설명해야 모르니까 그건 생략하자 이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략하면 항상 누군가로부터 결론만 듣고 살아가야 되는데 그 결론이라는 것이 정확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사회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맞힐 수는 있겠지만 그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맞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앞으로 어떨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실상 누군가로부터 절대적인 결론은 받을 수가 없어요. 전문가가 열 명이 있으면 열 명의 전문가가 다 각자 다른 의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중의 몇 명은 같은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열 명 전부가 똑같은 결론을 내릴 수는 없어요. 절대적인 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듣고 판단하는 기준은 항상 나에게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도 성도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 즉 교리적인 배경들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말씀을 들을 때에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깔려있지 않으면 말씀을 전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 반응만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조는 거죠. 왜? 모르는 말이 30분, 40분 계속 진행되면 졸음이 오는 거예요. 그것은 어쩔 도리가 없어요. 왜 좁니까? 사실은 머리 속에서 지금 듣는 말씀이 제대로 처리가 안 되기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지면서 졸음이 오게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기 위해서는 평소에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그리고 교리공부와 같은 것들에 힘을 써야 되는 것이에요. 이 기반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려오고 이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것이에요. 이런 기반이 없으면 전혀 이 말씀을 들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많은 세월동안 설교를 듣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설교의 흐름 같은 것들을 알게 되는 일은 일어납니다. 사람은 자꾸 듣다보면 문리를 터득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너무 많은 세월이 필요해요.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허송세월을 해야 되는지 그 시간이 아깝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기회를 소망해야 되요.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공부하면서 말씀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위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떠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거룩함이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것이에요.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세상입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그 속에서 산다고 해서 세상의 원리를 따르고 그리고 세상을 의지해서는 안 되지요. 이것은 이미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드렸던 말씀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음행하는 자에 대한 교훈을 들었을 때 세상을 떠날 것처럼 이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여기서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교회가 세상 속에 있고 그리고 세상을 떠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씀을 드리면 교회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냥 수동적으로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걸로 끝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근데 문제는 여기서 '교회'라고 표현할 때 우리는 항상 추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말할 때에는 항상 사람을 떠올려야 되요. 그리고 구체적인 사람, 바로 '나'를 떠올려야 되는 것이지요.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럴 때에 구체적인 사람 '나'를 떠올려야 되요. 교회는 이 세상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된다고 말을 할 때 그 때 구체적인 사람 '나'를 떠올려야 되요. 내가 세상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됩니다.

 

대학 시절 생활에 대한 후회

제가 저의 대학시절에 대해서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문제들입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제가 대학에서 보냈던 시간은 대부분 강의를 듣는 시간이었어요. 학교에 갔다가 틈나면 교회 오고, 학교에 갔다가 끝나면 교회 오고... 이래가지고 거의 대부분 교회가 중심이 되고 학교는 강의 시간에만 가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울타리 안에 이렇게 있다가 학교 가는 시간, 강의 시간에만 갔다 오고 수업에만 갔다 오고... 마치 두더지처럼... 왜 길거리 가다 보면 가게 앞에 "두더지 잡기"라는 게임기가 있잖아요. 게임이 시작되면 두더지 인형 그것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망치 들고선 막 내리치잖아요. "요놈! 요놈!" 내리치는데 결사적으로 내리칩니다. 그런 것처럼 기독교인이 잠깐 튀어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두더지처럼 직장에 탁 갔다가 오고, 학교에 탁 갔다가 오고... 이러면서 언제나 숨어있는 곳은 교회, 교회의 행사, 교회의 의식, 교회의 무슨 여러 가지 일들... 이런 울타리에 딱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선 학교 갈 때만 착! 직장 갈 때만 착! 나왔다 금새 들어가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살았어요. 지금도 후회하는 게 그겁니다. 학교에 가서 강의 시간에 들어가고 나가는 동안에 사람들하고 잠깐 인사 나누는 정도... 어쩌다가 그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차 한 잔 마시는 정도... 그런 정도였어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울타리 안에 늘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요. 이것이 우리에게 큰 문제입니다. 그의 정신세계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것들로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세상 속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위하여 그 말씀을 자기의 삶으로 살아가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아니 필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우리는 부름을 받았고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제가 지금도 늘 대학시절을 생각하면 후회하는 것이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물론 대학생활에 정을 붙이기 어려운 현실들도 있었습니다. 늘 데모들이 있었고 대학생들의 관심은 독재정권이 어떻고, 군사정권이 어떻고 하면서 그런 문제들로 날마다 날을 지새우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학교에 가서 제대로 학업에 힘쓰고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닌 것도 있었어요. 우리는 그런 속에서 고민한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데모해야 되냐, 말아야 되냐?' 이런 것들, 또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여기서 '사회참여'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독재정권에 항거해서 대항하고 싸우는 이런 것들로만 생각했어요. 그런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거지요. 그러니 학교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그 안에 깊이 들어가서 학문에 힘을 쓰고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아까워요. 젊은 시절에 머리가 좋고 한창 발전해 나가는 그 시절에 제대로 된 사상과 방향 제시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 그 많은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정말 학업에 힘을 쓰고 학문을 갈고 닦으면서 그 지성을 갈고 닦아서 그 이후의 사역을 더 크고 더 깊게 준비할 수가 있었을 터인데 그 지나간 세월이 너무나 아깝다는 거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그런 시간들을 놀면서 헛되게 썼던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놀기는 뭐 제대로 놀겠어요? 노는 것 제대로 없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스타크래프트'같은 컴퓨터 게임이 있어서 그거 한다고 밤새서 교회도 안 나오고 이러는 일도 없었거든요. 그 때는 노는 문화 자체가 없었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논다고 해봤자 둥글게 모여 앉아서 수건돌리기나 했지, 찬송이나 부르면서... 제대로 된 사상을 배우고 제대로 된 삶의 자세를 배웠더라면 그 젊은 시절을 낭비하지 않고 더 깊고 더 높은 것을 붙들고 씨름했을 것이다 그 얘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되요. 적극적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이 세상의 삶과 이 세상의 문화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현대 교회의 문제 - 문화의 퇴행성

그런데 참 안타까운 사실은 믿음이 좋다하면 세상으로부터 움츠러드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안에 따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져다 놓는 거죠. 가요? 이건 세상 것이니까 가요는 아닌데 가요와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즉 가요와 같은 음악형식에 기독교 색채를 가미하는 방식으로 노래를 만들고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지요. 이것이 바로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입니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 음악'이라고 좋게 번역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 현상은 다른 게 아니에요. 그냥 가수처럼 다니면서 활동하는 거잖아요? "CCM 가수입니다." 그런 얘기하는데 사실 가수처럼 다니면서 활동하는 거예요. 단지 "나는 연예계 활동 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거죠. 이게 뭐냐면 세상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서 그 세상의 삶에서 자기가 긍정적으로 역할을 해야 되는데 그 부분에서 지금 뒤로 물러나 있는 거죠. 일종의 퇴행성 문화인 거예요. 무슨 '선교 발레'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요새는 좋은 말로 '워십(Worship)'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게 어떻게 워십입니까? 그냥 가스펠송 틀어놓고 율동 하고 무용하게 되면 그게 워십입니까? 워십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이것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그 말씀 앞에 복종하는 이것이 워십 아닙니까? 그런데 왜 워십이 이렇게 바뀌었어요? 물론 우리가 가스펠송을 틀고 무용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이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것 자체는 퇴행성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이 정상적인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활동하지 못한 채 뒤로 자꾸 물러나는 것이지요. 이 세상의 문화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이것이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 중 하나예요. 우리는 세상의 삶에 들어가야 되요.

 

이율배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

물론 세상의 삶 속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 자체가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존재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의 공로로 그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죄 사함을 얻고 정결하게 되고 또한 생명을 얻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죄의 유혹과 미혹 속에 늘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실 속에서 때때로 범죄하고 우리는 그 사실로 인해서 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의 불의한 것, 우리 속에 있는 불평과 불만,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질투 같은 것들로 늘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런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존재,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역설적인 세상의 삶

그런데 그가 살고 있는 이 사회 또한 마찬가지예요. 이 사회도 구조적으로 악과 죄를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회생활을 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거기에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연루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천 원짜리 물건 하나를 사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사실 이게 경제활동이거든요. 그래서 그 천 원짜리 물건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경제활동의 결과로 내 손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경제활동의 어느 부분에선가는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죄악들이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세상은 단독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항상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원치는 않지만 그러나 집단적이고 제도적이며 문화적인 죄악 속에 우리가 연루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길거리를 가다가 천 원짜리 양말을 삽니다. 굉장히 싸죠. 싸기 때문에 우리는 "이야! 정말 싸구나!" 그러면서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 싼 것을 싸게 팔기 위해서는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면 값싼 노동력은 어디서 오는 거예요? 값싼 노동력은 선진국에서 올 수가 없습니다. 왜? 거기는 임금이 높기 때문에 그런 걸 생산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디서?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 그것도 어린 아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값싸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열 살, 열한 살, 열두 살짜리들이 하루에 열두 시간, 열세 시간, 열네 시간씩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을 해야 되는데, 그 아이들이 한 달 동안 받는 돈이래야 불과 얼마 안 된다는 거지요. 우리 돈으로 따지면 만 원이나 될까? 겨우 그 정도를 임금이라고 받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나이에 그만한 시간 동안에 그 공장 나가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을 하면 아이들은 언제 교육받으며 언제 놀며 언제 운동합니까?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크지 못하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운동도 해요. "어느 나라에서 생산한 어떤 물건은 사지 맙시다. 그 물건은 값싼 임금을 주고 아이들을 노동으로 몰아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사면 안 됩니다." 이런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게 아니에요. 참 복잡합니다.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사고 먹고 하는 동안에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의도하지도 않은 사이에 이와 같이 처참한 상황에 연결될 수 있는데 세상 속에 적극적으로 살 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우리가 가서 이런 모든 것들을 다 두드려 엎어서 뒤집어엎어서 완전히 변화시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이죠. 성경적으로 볼 때 역사 속에서는 이런 일들이 완전히 없어지는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세상이 오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언제나 세상 속에서 이와 같이 구조적인 악과 죄 속에 연루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설이에요. 우리는 그런 역설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내 내부에서, 내 내면 속에서 역설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이와 같은 역설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혹은 수도원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서 우리끼리 살면 해결되겠습니까? 그렇지가 않지요. 수도원 역시 조직입니다. 거기도 역시 내면에 죄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내가 그곳에 들어가면 그 순간 그곳은 이미 완전한 곳이 아니잖아요. 어떤 분이 완전한 교회를 찾아서 다닙니다. 깨끗하고 순결한 교회를 찾아다닙니다. "야! 이 교회가 순결하구나! 맞다! 이 교회다!" 그리고 등록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교회 들어간 순간 그 교회는 이미 더 이상 순결한 교회가 아닌 것이지요.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데 순결한 교회입니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순결한 사람이 없어요. 그 속에 항상 죄를 품고 있잖아요. 그리고 기회만 주어지면 그것이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우리들이 지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우리를 향하여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새롭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원칙을 따라서 세상 속에 들어가 살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100% 바꿀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에요. 다만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이 세상의 변화와 이 세상의 심판에 대한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지요.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을 증명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에만 우리가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면 안 됩니다. 물론 예배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삶이 우리에게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세상에서의 적극적인 삶을 버리고 자포자기한 채 교회 안에서만 우리끼리 지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가 퇴행, 퇴보해 나아간 것이에요. 마치 손하고 발하고 잘려서 몸통하고 머리만 있는 것처럼... 그런 사람 실제로 있었어요. 그런데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없다면 교회는 마치 손발 다 잘리고 머리와 몸통만 남아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거예요. 성도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살아야 되요. 직장인들은 직장생활에서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의 신분을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아야 됩니다. 학생들은 학교생활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이에요. 과거에 제가 후회했던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세상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문화를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참여로 건설적으로 이루어 나갈 때 교회는 세상과 접촉점을 가지면서 세상의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철수하고,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철수하고 우리끼리 모여서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틀어놓고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참된 찬양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찬양은 성도들의 적극적인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에요. 우리가 세상에서의 삶이 없다면, 적극적인 참여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곳에서 진정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없다면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할 수도 없고, 참되게 예배할 수도 없으며, 교회는 이 세상에서 오히려 멸시받고 천대받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사도 바울의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말을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오해했습니까? 또 왜 그런 오해가 생기게 되었습니까?

 

 

3. 우리가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4. 교회를 말할 때 항상 사람을 떠올려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5. '교회가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6. 그리스도인은 '역설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존재'라고 했을 때,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러한 존재로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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