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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_책_리뷰

예배학 [교회와 예배]_김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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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학 [교회와 예배]_김영재

 


교회와 예배

저자
김영재 지음
출판사
합신대학원출판부 | 2008-03-1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신학자 김영재의 『교회와 예배』. 개정증보5판. 사람들은 한국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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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선교를 통하여 복음을 받았으며, 복음을 통하여 기독교적 예배를 알게 되었으므로 바람직한 예배를 모색하려면 기독교 예배의 전통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예배의 전통은 성경에서 발원하고 있다. 기독교 예배 의식은 단일하지 않다. 교회의 제도와 신앙고백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식이 어떤 전통에 속해 있는지 점검함과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원리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교회 예배와 회당예배 - 회당의 예배와 교회의 예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유대교 회당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물 드림을 생략함으로 예배의 근거와 핵심을 상실한, 인본적 예배였고, 교회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 되심에 근거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는 예배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거기에 근거하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식을 행하는 데서, 그리고 초대 교회가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하였다는 사실에서 교회의 예배와 회당의 예배는 구별된다. 교회의 예배가 형식으로 보아서는 회당의 예배를 본받은 것 같지만,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구약의 제사 종교의 예배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요 그 완성이다.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루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 예배는 온전하게 드릴 수 있는 예배로 대치되었다. 구약에서 동물을 희생으로 삼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제사의 중심이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정결함을 받아야 한다. 허물을 덮어 주시는 은총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희생의 제사, 즉 피를 뿌리는 제사를 드려서 가능한 것으로 성경은 가르친다.

 

족장들에게 축복의 언약을 하시며 그 언약을 새롭게 확인하실 때, 그들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감사하며 경배했다. 축복의 언약을 주시며, 언약을 새롭게 하실 때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지시하셨다. 이렇게 제물을 드림으로써 예배하는 예배 의식을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제도로 정해 주셨다.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제물을 통틀어 '예물"이라고 한다. 예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번제와 소제로 구분한다. 짐승으로 드리는 제사를 번제라 하고, 곡물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 소제이다. 화제란 예물을 드리는 방법을 두고 지칭하는 말이다. 번제이든 소제이든 모든 예물은 전부 혹은 일부를 화제로 드리게 되어 있다. 번제는 예물을 드리는 목적에 따라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구분된다. 화목제는 서원을 하거나 자원하여 드리거나 감사함으로 드리는 경의 제물이다. 속죄제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을 경우 사함을 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고, 속건제는 이웃에게 잘못을 저질러 사함을 받고자 할 때 드렸다.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 자체를 좋아하셔서가 아닌, 죄를 범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죄 사람을 주시고, 구원하시며 교제하시기 위해 부득이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시는 여부는 드리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달려있다. 구약의 제사는 일반종교의 제사와 그 형식은 유사하나 일반 종교에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바와 다르다. 구약 제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당신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생명을 담보로 세우신 언약이다. 그러나 일시적이고, 제도적인 것이며,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 인류의 죄를 영원히 속하시는 제물이 되신 것이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께 예배한다.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고, 까다롭고, 물질적인 제사제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족장 시대에는 예배하는 장소가 따로 없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 하나님이 나타나 당신을 보이시는 곳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는 예배소였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에서 생활할 때 예배하는 처소가 있었다. 성막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어져서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시대가 왔음을 상징한다.

 

성경에서는 예배를 절하다는 뜻과 섬기다는 뜻을 가진 말로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의 대상을 아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기독교 예배는 백성이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고 바치는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베푸시는 은혜를 받는 예배이다. 예배에서 드리는 찬송, 기도 및 삶에서 드리는 우리의 헌신은 예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삶을 이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드리는 응답과 간구이다. 구약성경은 참 하나님과 거짓 신을 잘 분별하여 예배할 것을 말하며, 참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는 언약을 주시면서 율법과 계명을 주셨다. 왜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그 요지는 십계명에 나와 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은 바로 예배 계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나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고 우상이나 다른 신에게 어울리는 예배를 드렸다. 저급한 무당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하듯이 섬김의 삶 없이 윤리적인 삶 없이 맹목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복을 비는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이제 예배 때 사죄의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죄인임을 깊이 느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되었음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또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고, 안식의 축복을 누리며 예배해야 한다.

 

십계명의 제4계명을 이해함에 있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날에 관심을 두고 역점을 두어 이해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레 중 한 날을 쉬도록 하시고 축복하시며 예배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여기는 목적은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며, 그에게 예배하고 그가 주시는 안식의 축복을 누리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시오 구원의 주가 되심을 인식하고 예배해야 한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함으로 예배하며 말씀을 들음으로 예배해야 한다. 또한 언약을 새롭게 하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께 예배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예배로 표현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예배에 대한 일정한 형식을 말씀하고 있지는 안다. 또한 교회의 제도에 대해서도 완성형의 교회 형태를 말씀하지 않고 있다. 신약의 교회는 생성되어 가며 성장해 가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예배나 교회의 제도의 경우 성경적인 것을 추구하되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안목을 가지고 추구하고 이해해야 한다. 다락방의 가족적인 모임의 경우 예배당에서 많은 사람이 회집하여 이루는 모임의 경우와 같을 수 없다.

 

예배 의식은 교회의 조직과 제도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된 것이고 그러한 발전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2세기로 접어들면서 감독교회로 발전하게 되었고, 교회의 제도가 확립되면서 교회는 예배를 위한 예전도 갖추게 되었다. 중세에는 교회의 제도는 교계주의 교회로 발전했고, 예배 예전도 지나치게 복잡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 제도를 개혁함과 동시에 예배 형식도 개혁하였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모여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면,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말씀을 강해하거나 설교하는 예배 형식을 갖추었다. 이런 형식은 유대교 회당에서 행하던 예배 형식을 자연스럽게 본받은 것이다. 예배 후 애찬을 나누고 친교하면서 떡과 포도주로 성찬을 나누며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였다. 교회 건물이 서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애찬은 생략되고 예배는 더 많은 의식을 갖추게 되었다. 교회는 두 가지 예배 특성을 이해하고 조화 있게 잘 유지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다락방교회와 같이 작은 교회와 조금 더 큰 교회들의 예배 특성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의식을 갖춘 예배는 형식에 치우칠 수 있으나, 다락방식 예배는 더 알차게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예배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작은 교회는 목회자를 가까이에서 보고 만나며,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누릴 수 있다. 그럼에도 예전적 예배를 동경한다면, 성찬식을 자주 행하면 된다. 성찬식은 예전적 예배의 정수이다.

 

종교 개혁자들에게 있어 예배의 갱신은 잘못된 신학에 근거한 로마 카톨릭의 예배가 아니고 보다 신학적 타당성이 있는 성경적인 예배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예배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므로 예배의 갱신에는 충분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신학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목회자가 어떤 유형의 예배 형식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신학과 교회관을 따라서 할 것이다. 예배의 갱신은 교회의 전통과 신학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학 적인 명분이나 설명 없는 예배의 갱신은 예배의 맹목적인 수정일 뿐이며 그것은 곧 신학의 수정을 초래한다. 또한 예배 형식의 갱신이 반드시 생동성 있는 영적 예배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예배 갱신은 우리의 삶의 갱신과 개혁을 포괄한다. 예배 형식의 갱신에는 삶의 개혁이 동반되어야 하고 밑받침되어야 한다.

 

여러 종족과 민족들은 문화적인 배경을 따라 예배 형식을 달리 한다. 한국 교회의 예배 형식 역시 문화적인 영향을 받고 어떤 특징을 갖게 되었다. 문화는 변모되고 있는 것이다. 다락방식 예배, 나아가 경배와 찬양 식 예배를 드리든지 전통적인 예전적 예배를 드리든지,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이어야 하며 회중이 이해하고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는 예배여야 한다.

 

1960년대 한국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로 신학자들 간에 열띤 논쟁이 있었다. 토착화를 서두르는가 하면, 보수적 신학자들은 토착화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한국 교회가 자라오면서 신학과 실천이 여러 면에서 한국 특유의 것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지향한다면 구체적인 개혁의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신학적인지 물어야 한다. 한국은 무속적인 민속 신앙의 영향을 받아 예배와 예배 인도자에 대해도 구약적 요소와 일반 종교적 요소가 다분히 들어와 있다. 목사를 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중보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지나치게 떠받드는 것과 초인간적으로 활동하고 살기를 요구하는 것도 그러하다.

 

루터는 예배 의식에서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것은 허용한 반면 칼빈은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했다. 두 신학자 모두 예배에서 비성경적, 비신학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교회 예배의 특이한 점은 예배당의 구조부터 언급할 수 있겠다. 교회 건물은 지역 사회의 문화와 가시적으로 접촉을 하며 문화에 참여하고 함께 문화를 형성한다. 그래서 교회당을 세울 때 이웃 건물과 조화와 사회 공동체의 전체 분위기도 고려해야 한다. 예배당의 내부구조는 서양과 달리 비 개신교적 이해를 한 점이 많이 있다. 강단을 제단이라 부르고, 회중과 차단된 거룩한 곳으로 보기도 하며 신을 벗고 올라가는 점이 그런 것들이다. 예배 시작전 종치는 일과 예배시의 헌금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 강단을 꽃으로 장식하고, 장로와 집사가 가운을 입는 것, 또 장로가 대표로 기도하는 것, 축도자의 자세 등 많은 부분에서 서양과 다르게 발전되어 왔다. 즉 교회 외부의 것은 서양의 것을 가져오려고 하고, 내부적인 것은 우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교회가 성례를 자주 행하지 않고 설교 중심의 예배를 해왔기 때문에 교인들은 예배하는 것은 곧 설교 말씀을 듣는 것이라 생각할 정도이다. 그래서 성찬식을 자주 행하고 예전과 설교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 루터는 예배에서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강조한 점에서 루터교회의 예배가 보다 주관적인 것이라면 칼빈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강조한 점에서 개혁주의 예배는 보다 객관적인 면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루터교회의 영향을 받은 경건주의적 부흥 운동을 경험한 한국 교회는 예배에서 주관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다. 복음주의 경향이고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설교만 할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인지 동시에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주관적요소와 객관적 요소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개혁주의 전통을 존중하고 보수한다고 표방하지만 예배에 대한 일정한 형식이 없다. 역사적으로 2세기 초부터 교회는 예배 의식과 기도서를 가졌고, 개혁주의 전통역시 단순한 예배와 형식을 가지는 것이지만 예배서나 기도서를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청교도적인, 혹은 부흥적이며 복음주의적인 예배 전통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예배 지침서가 될 수 있고, 모범이 되는 기도를 수록한 예번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서화된 예배의 원리나 지침은 있어야 예배할이 성립할 수 있다. 또 한국 교회는 성찬식을 일 년에 두 차례 밖에 가지지 않은 초기 선교사들의 어쩔 수 없었던 모습을 계속해서 답습하고 있다. 성찬식을 더 자주 가져야 한다.

 

초대교회의 단순하고 순수한 예배 형식을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번잡한 예배 의식을 지양했다. 3세기에는 예전의 형식이 조금 추가되었다가 4세기 기독교 공인 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기 시작했다. 교회 외부에서 많은 것들을 도입하였고, 의식과 상징들을 사용하며 미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예배를 맡은 자들이 예배를 시작하기 위해 입장하는 장엄한 의식도 시작되었는데, 작은 입장 행렬과 큰 입장 행렬의 모습도 등장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의 폐단을 개혁함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착수한 것이 바로 예배의 개혁이었다.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고, 예배서를 펀찬하였다. 칼빈은 예배가 성경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배의 이해 가능성을 강조하여 회중의 언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칼빈은 예배는 사람의 덕성을 함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세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찬의 문제가 있었다. 말씀 자체가 닫히거나 약화되었을 때 비본질의 것들이 커지게 되었다. 말씀이 닫힌 곳에 라틴어를 강조하기 시작하고, 라틴어를 못 쓰면 무식하다고 여기게 되어지고, 교인들과 사제들 속에 같은 마음으로 취급되어졌다. 외형과 형식, 즉 복장, 제도, 화상, 형상이 강조되게 됨. 처음에는 교훈적 의미에서 도입되었던 것들이 점차 우상화되게 됨. 말씀이 사라진 곳에 교리가 들어서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례라고 하였고,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거기다 권징을 덧붙여 말하였다. 권징은 교회의 조직과 질서, 교인의 성결한 생활을 다 포괄해서 하는 말인데, 말씀과 성례가 옳게 선포되고 존중되는 교회에는 권징도 갖추게 마련이다.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가 되려면 이 3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 라틴어로 성례는 약속을 지키는 진리라는 뜻이다. 칼빈의 정의에 따르면 성례는 단순하면서도 내용을 가진 개념으로, 하나의 외적인 징표인데, 주님께서 그것으로써 우리 마음에 그가 세우신 언약을 인쳐서 우리의 신앙이 연약하게 될 때 보호하시며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세례는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것으로, 새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징표이다. 개혁자들에게 세례는 하나이며 물세례는 사람을 내적으로 정결케하는 성령 세례를 표상하는 외적 징표였다. 칼빈은 세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있어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하나의 징표라 하였다. 유아 세례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자들이 어거스틴의 견해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찬에 대해서 카톨릭은 언제나 제물로서 생각한다. (화체설)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을 그들은 부활이라고 봄. 예배의 입장에서 볼 때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만 강조. 제사만 강조. 완성의 의미로서는 약하다.

 

쯔빙글리 기념설 : 초창기 말씀과 성례전 두 가지를 지키도록 강조되었지만, 쯔빙글리에 이르러 오로지 말씀만 강조하고, 결국 성찬 거부 까지 가버리게 되었다. 성찬은 기념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성찬이 약화되었다. 사제를 부인하였고, 결국 사제는 필요 없다고 보았다. 기념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으면 은혜가 될 것이다.

 

루터의 공재설 : 반면 루터는 형식은 놓아두고 내용만 바꾸려고 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임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직 사제의 권위가 남아있게 되었다.

 

칼빈의 영적(성령) 임재론 : 1) 성경적 원리를 추구하고, 성찬을 하신 분이 예수님. 2) 초대교회를 비롯한 좋은 역사. 초대교회, 속사도의 모습(교부시대). 즉 제도화하기 이전 로마 카톨릭 이전 제도화되기 전에 어떤 모습인지 보게 되었다. 3) 조화와 균형. 성직자는 균형을 잡을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칼빈의 추구점) 성경과 역사(시대, 변화,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변하지 않음) 성경적, 역사적, 균형 잡힌 원칙들을 생각해야 한다.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님의 생명과 공로를 전달하신다. 루터와 카톨릭은 그 주체가 사제라 보고, 쯔빙글리는 각자 개인이라 보았다.

 

한국 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의 칼빈의 견해를 따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츠빙글리의 견해를 따르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게 하는 상징으로 성찬을 가볍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해에 성찬을 두 번이나 네 번 밖에 보지 않는 것이다.

 

예배 인도는 목사의 직무이다. 목사를 제사장으로 보는 사상은 옳지 않다. 그것은 카톨릭적 견해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목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목사가 될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며,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고, 일반 지식도 갖추어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칼빈은 교회를 성도의 모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으로 보며 성도의 모임이라는 개념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라는 개념이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그래서 목사의 직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장로교 헌법에 교회의 항존직인 장로를 구분하여 목사를 가리켜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장로라 하고, 장로는 치리만 하는 장로라고 구별하고 있다.

 

부활절과 성탄절은 성경적인 절기이다. 한국 교회는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교회의 3대 절기로 지켜왔다. 개신교에서 성찬과 세례만 성례라고 하므로 혼인 예식과 장례예식은 본래적 의미의 예배는 아니다. 다만 인간사의 큰 행사, 즉 혼인과 장례의 의식을 행하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행한다는 의미에서 예배라는 말을 붙여서 그렇게 부르는 것 뿐이다. 이러한 예배에서는 혼인 예식과 장례 예식을 행하는 것이 그 목적이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 아님을 인식하고, 본래적 의미의 예배와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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