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도서_책_리뷰

사도행전 신학(캠브리지 신약신학 시리즈) 서평_야콥 예르벨

반응형

제 목 : 사도행전 신학(캠브리지 신약신학 시리즈) 서평

저 자 : 야콥 예르벨

 

 

샌더스(J. T. Sanders)가 극단적인 반-유대적 입장에서 사도행전을 해석한 사람이라 평가되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 선 사람으로 야곱 예르벨(Jacob Jervell)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유대교의 문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신학을 해석하기 위해 함께 취급해야 할 문제로 대표적인 두 학자의 입장과 두 가지 입장을 모두 취하는 타이슨의 통합적 견해가 있다.

 

 

 

 

야곱 예르벨의 친-유대적 입장(pro-Jewish)이방인 선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달해줌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p.19) 그의 해석은 회당의 연속선에 교회가 있다는 방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아직 이런 문제를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견해이기도 하다. 유대인 선교의 연장선에서 이방인 선교를 보는 것도 그의 독특한 해석이다.

 

예르벨의 책을 옮긴이가 샌더스와 예르벨의 차이점을 분석한 것이 이 책을 이해하며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샌더스의 경우 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구조를 전체적으로 분석하면서 문학적인 구조에서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는 반면, 예르벨은 전적으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원사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유대인들을 취급하고 있다. 또한 누가의 문서가 반유대적이고, 또 동시에 친유대적인 논조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유대교의 문제는 복잡한 문제로 남아있다. 과연 예르벨의 논조처럼 사도행전이 유대적인가 하는 문제는 신선함은 있지만 너무 극단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저자가 풀어가려고 하는 주제 중 하나는 사도행전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의 연속성이다. 그가 설명하기를 누가의 주된 관심은 교회를 메시아-예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의 단절되지 않는 연속인 바로 그 유일한 참된 이스라엘로 제시하는 것이다.”(p.34) 그러면서 기독교의 메시지가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문화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신약 중 특별히 사도행전이 유대적 특성이 돋보인다고 주장한다. 예르벨은 3개의 문제들이 누가의 사도행전 기록 목적을 알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할 주제라고 말한다. 1) 사도행전의 강한 유대적 특성, 2) 성서의 해석, 3) 율법을 지키는 사도이자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사인 바울의 입장.

 

 

 

 

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교회를 이루어 갔는지 증언하는 증인이었으며, 그의 독자들에게 교회가 실제로 이스라엘이고 언약들은 성취되고 있고,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저술한 것으로 본다.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정의는 1세기 후반 교회를 떠나 유대공동체로 돌아가려는 이탈자들을 막기 위해 누가가 펜을 들었다는 것이 예르벨의 견해이다. 결국 이스라엘 유산의 상속자로서의 교회 이해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연속성을 가지게 하려는 누가의 목적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를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쪽 단면만 보려고 한다면 전체적인 조망을 얻을 수 없듯이, 사도행전에는 분명 반유대교적인 흔적 역시 녹아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가 책의 앞부분에서 주장하는 선교에 대한 부분은 조금은 이해하기가 힘이 든다. ‘이교도들에게는 선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에서 죄의 심각성과 중심적인 위치가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교회에 수용된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오직 이들만이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며, 그 첫 번째 패러다임이 고넬료의 이야기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멜리데라는 섬에 파선한 사건을 볼 때 예르벨의 논조는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멜리데에 있던 원주민들이 바울의 기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그들이 예전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던 경건한 이방인들이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예수 사건과 교회의 모든 일들이 지나치게 이스라엘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길을 잃어버린 듯하다. 또한 67 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는 누가의 칭호 사용에 있어서 일부 칭호의 부재는 누가가 메시야 이신 예수의 모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며, 선재하지 않으며, 성육신하지 않으며, 창조주나 창조의 도구가 아니며, 우주적인 화해자도 아니며, 하나님의 형상도 아니다.” 누가가 사용하지 않은 칭호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그가 파악하기로 예수는 하나의 수단으로 누가의 신학에서 인식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행 1:7을 구원의 사역이 하나님의 사역이며 그리스도는 그 도구라고 보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사도행전에서 승귀하신 그리스도는 놀라울 정도로 수동적인 인물로 파악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보여 주는 바 수동적이라는 부분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통일된 신학적 패턴이 있다면 가장 뚜렷하게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수동적이라고 보는 그의 견해는 타당성을 잃는 것이라 여겨진다. 또한 예수님이 포용했던 사람은 유대인이었다기 보다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받고, 오히려 그 주변을 떠돌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사도행전의 친유대적 해석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치밀한 분석은 성경을 보는 눈을 길러주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당시 유대교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이방인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 평소에 잘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분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좀 더 누가의 시각, 저자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숙고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대인 됨의 문제가 사도행전을 다루기 위해서 짚어 보아야 할 중요성한 문제인지 알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구약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초대교회로 이어지며 그러한 연속성 속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간직해야할 중요한 유산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조건을 달고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순종하는 한,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이며, 비유대인들이 오직 이스라엘에게 속한 그 선물을 받는 것은 선례가 없는 것이며, 누가는 이것을 기적이라 강조한다는 그의 설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대한 깊은 감동을 끌어낸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으로 부르듯, 누가가 이스라엘과 성령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성령은 항상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부분임을 보여 줄 때, 그는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연속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령이 있는 곳,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발견한다고 예르벨이 했던 말은 신앙의 야성을 잃어가고, 타성에 젖어든 현대 교회가 좀 더 곱씹어 봐야 할 말임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교회에 대해서 더욱 고민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영광과 그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