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역사에 대하여
1910년 한일합방은 국가와 민족의 망함이었고, 그런 가운데 1912년 하나의 교단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08년에 사립학교 교령을 공포하여 기독교계의 사학들을 통솔 감독하였다. 천황 사진에 대한 경례 강요에 교회는 우상숭배라 거절하였다. 그때부터 일본은 사찰하기 시작하여 교회에는 박해가 시작되게 되었다. 당시 한국교회를 주도하던 선교사들 역사 여러 파벌로 나뉘었고, 중립의 입장을 취하거나 아니면 일본 편에 섰던 자들도 많았다. 박해 속에서도 한국 장로교회는 부흥회를 열고, 교인은 더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신사를 들여온 것은 1918년이었다. 신사는 1930년 초반 만주 침략을 계기로 일본은 국민정신 통일로 중국을 침략하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우리 민족에 대하여 일본인 신하로서의 의무라는 조항을 내세워 천황의 선조들을 존중하라며 이것을 의무화 시켰다. 또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선조들에 대한 감사 의식이라 표명하며 교회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의 학교는 거부와 더불어 폐교의 길을 선택했다. 신사참배의 강요가 교회로 들어오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자체분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반대자는 즉시 투옥되었고, 고문과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한국 기독교 교계 중 가장 완강한 반대를 했던 교파는 장로교였다. 이후 많은 교회들이 폐쇄되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자로서 기록되었다.
장로교회의 분열의 징조는 193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역적 감정이 원인이었다. 북쪽에 편중되어 있는 교회들이 남쪽 교회의 의사들을 반영치 않는 불평이 일어 났으며, 1934년부터 이런 지역적 감정이 표면화되었다. 또한 신학적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일본 쪽에서 신학을 하고 온 사람들에 대한 예민한 시선이었다. 가장 치열한 대결은 박형룡과 김재준의 논쟁이었다. 1934년, 1935년에 보수파 신신학파로 장로회 총회는 분열을 노출하였던 것이다.
신사참배의 문재로 평양신학교가 휴학에 들어가자 한국인의 손으로 운영되는 신학교의 설립과 교역자 양성중단을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1939년 기성회를 조직, 1940년 조선 신학교가 개교를 하였다. 일제의 요구를 비교적 수용했던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등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였던 것이다. 1940년대 보수주의 신학의 폐허 위에 자유주의 신학이 지경을 넓혀 갈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신학적 대립은 심각해 졌고, 결국 한국 교회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해방 후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뿐이었고, 이 신학교는 ‘남부 총회’에 의해 한국 장로교 직영신학교육기관으로 승인 되었다. 이렇게 총회 인준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 교수들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으로 인해 진보적 노선의 학교가 되었다. 1947년 조선신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51명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일동” 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장로교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이들은 정규오, 한남석, 이노수, 손치호 등이었다. 총회는 8인의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조사하게 했고, 김재준 교수에게는 진술서를 제출하도록 하여 그의 성경관과 교리문제에 대한 진술서를 제출했고, 박형룡 박사는 김재준의 성경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경관이고, 교리문제에 대한 그의 변명은 신신학의 교리관이라 비판하였다. 1950년에 제36회 총회에서 새로운 총회직영 신학교의 설립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조선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조선신학교 측은 강하게 반대하였고, 1952년에는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성경유오설 주장자라는 이유로 제명을 결의하였다. 결국 조선신학교는 그해에 교회 분립을 결정하였다. 결국 조선신학교는 1953년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별도의 총회를 조직하였다. 기독교장로회의 출발이었다.
조선신학교와 같은 자유주의신학에 한국 교회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고 본 이들은 보수주의 정통신학을 가르칠 신학교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래서 1946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고려신학교는 말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전개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것이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의 신학이념을 유지, 계승, 발전시키려고 했던 점은 고려신학교 설립의 동기였다. 고신교단이 보수주의,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하려고 했던 이유는 일제하의 신사참배 강요에서 보는 바처럼 신학적 자유주의는 신앙의 투쟁과 영적 싸움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다는 역사적 반성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1년 총회를 이탈하였다. 또한 고려파의 분립은 신사참배의 문제를 가지고 갈등을 겪다가 빚어진 일이었고, 교회의 잘못과 그에 대한 철저한 회개, 그리고 친일파 잔재 청산을 통해 쇄신운동을 하려 했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결국 신학교 문제로 인하여 총회가 분리되었고, 경남노회의 분규가 일어났다.
해방 후 교회 재건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재건 운동은 해체되었던 교회 기구나 조직의 재건만이 아닌 영적 갱신과 쇄신의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 교회쇄신운동으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북한에서의 쇄신운동은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이기선, 채정민 목사 등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었고, 여러 북한의 지역 교회와 노회가 재건되었다. 신사참배에 동참했던 죄과를 통회자복하는 금식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재건운동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제하에서 친일적 인사로 분류되었던 교회인사들이었고, 자신들도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했다고 변론했다. 서로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고, 결국 소득 없는 싸움이 되었다. 그 와중에 북한의 공산정권은 기독교 박멸정책에 나섰다. 북한에서 기독교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에 공산정권 수립에 위협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1950년 평양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강제 통합시켜 “기독교 신학교”로 만들고, 정원 역시 120명으로 축소시켜 600명 이상이었던 학생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또한 공산정권은 교회지도자들 역시 축출하기 시작했고, 많은 교계 지도자들이 순교하기에 이르러 북한에서의 교회재건과 교회 쇄신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출옥한 지도자인 이기선 목사 등은 1945년 9월 20일에 발표했던 한국 교회 재건원칙을 그대로 실시하는 교회들을 규합, 재건했는데, 그 교회수는 30여개 정도였다. 이들은 별도의 독노회를 조직하였고, 철저한 회개의 기간과 검증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공산당치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1951년 1.4 후퇴 때 다수의 교인이 월남하여 남한의 재건파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서울에서 진행된 교회 쇄신운동은 별 효과 없이 진행되었다. 해방후 장로교회 역시 재건을 진행하였고, 1946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 총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분단 이후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에 남부총회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총회에서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조직의 인사들이 계속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체제의 변화는 없었다.
1959년 장로교회는 합동과 통합이 분열하였다. WCC문제와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단이 되어 서로 이탈한 것이었다. 또한 박형룡 교수의 3천만환 사건이 발단이 된 사건이었다. 이들이 각기 서울의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에서 별도의 총회를 개최함으로서 결국 승동측과 연동측, 즉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WCC에 대한 견해 차는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WCC가 정통신학에서 이탈하였다고 본것이었고, 신앙고백적 일치보다 외형적 연합을 강조하고, 또 용공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이 운동에 반대한 것이다. 1955년 장로교 총회에 다녀온 김현정 목사는 장로교 제 40회 총회에서 WCC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보고하고, WCC가 용공이 아니며, 자유주의라 하난 칼 바르트 정도라고 하였다. 명신홍 목사는 WCC가 교리적으로 혼합주의적이며 용공주의적일 뿐 아니라 음주와 주초에도 분명치 못하다고 보고했다. 1956년 총회에서 이 운동에 대한 연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다음 해 총회에서 친선과 협조만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과거나 현재에도 참가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계속 참가하기로 하고,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반대하기로 태도를 결정하였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후 찬반 양론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미국의 NAE와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WCC를 반대하고 나셨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형룡 목사와 정규오 목사였다. 그 반대로 찬성하는 쪽은 한경직 목사였다.
이 대립이 1959년 총회에서 치열하게 대립되었고, 총회신학교 건축기념 3천만환을 사기당한 박형룡 교장에 대한 인책문제와 관련한 대립도 문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었다. 결국 승동과 연동으로 분리되었고, 재결합의 노력도 있었지만 지금의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어지는 결과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1950년대 부터 한국 장로교회는 몇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거기에는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이 있었다. 첫번째 분열은 일본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의해 불법적으로 침탈당한 구한말에 있었던 신사참배의 영향이 해방 후 교회에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1952년 재건파 및 고신교단이 이탈했고, 또한 신학적 입장의 차이로 1953년 기장 교단이 이탈했으며, 1959년에 WCC에 대한 신학적 노선의 입장으로 인해 합동과 통합이 나뉘어졌다. 신학적인 문제들, 일본잔재청산의 문제 외에도 내부적인 요인인 지연과 학연 등의 이유도 함께 작용했다. 이후에 나타난 특정 교단들의 분리나 이탈 역시 주도권 싸움과 지연 학연에 의한 비신학적 이유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고신교단과 합동교단은 1960년대 재 연합을 추진하다가 정치 논쟁에 휩싸여 통합 논의가 무산된 바 있다. 또한 1980년대 부터 교단 통합보다는 한국장로교 총연합회,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한국기독교 목회자 협의회,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 협의회 등 협의체를 통한 연합과 일치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한국장로교회의 연합을 위한 시도는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분열 또는 이탈 역시 일어날 수 있다. 민족 복음화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참으로 안타까운 손실이 아닐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곱지 않게 비추어지고 있다. 분열과 연합의 문제는 지금도 다루기 힘든 문제이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분리된 한국 장로교의 연합을 위한 계속적인 기도와 관심 뿐이라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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