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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영국 청도교와 장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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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도교와 장로정치

 

*장로 교인들도 장로교회가 존 칼빈이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장로교의 창시자는 존 낙스이며 칼빈의 신앙 노선을 따랐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첫 시작은 칼빈이 아니라 존 낙스이다. 낙스(1514_1572)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창시자이다. 후에 청교도들에 의해 발전하였다.

 

 

 

영국 국왕 계보도

헨리 8세(1509-1547) - 에드워드 6세 - 메리(블러디) - 엘리자베스

--튜터왕조 끝

 

스튜어트 왕조 시작--

제임스 1세(제임스 6세 ; 스코틀랜드 재임시, 헨리7세의 딸 마가릿의 아들, 1603-1625) - 찰스 1세 -

 

1642~1651 영국 내전 후 찰스 1세 쫓겨나고 - 청교도 혁명기 공화정치 시작

호국경 크롬웰 (그의 아들이 공화정을 말아먹음)

 

왕정복고 - 제임스 2세(프랑스 도피 후 귀국)

 

 

1. 영국 개혁자들의 장로정치사상

* 위클리프 : 이는 성경에서 제시한 교회 통치는 2직분 사상이라 주장하였다

2직분이란 감독과 집사만이 사도 시대의 직분으로 교황, 주교 등의 추기경 이런 직분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토마스 크랜머 :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켄터버리의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을 도왔다. 그는 저서 [기독교인의 제도](1533)라는 책을 통해 신약에는 집사, 섬기는자, 장로, 감독 직분 외에 다른 직분이 없고 상호간 등급이 없다고 주장하여 결국 에드워드 6세 치하의 주교들은 크랜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 존 낙스 : 크랜머의 2직분론 사상을 이어 받은 존 낙스는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에드워드 6세 때 구중 설교자가 되었고, 로체스터의 주교로 임명 받았지만 감독정치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임했다.

* 죤 아라스크 : 위클리프, 크랜머, 낙스의 교회정부 사상은 폴란드의 종교개혁사상가인 존 아라스크에 의해 더욱 발전 되었다. 그는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에 와있던 폴란드 개신교도들을 지도하여 교회를 치리하면서 당회라는 방편을 사용하여 장로정치를 세워 나갔다. 그는 각 회중에 한 명의 목사 장로들, 그리고 집사들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지교회의 문제점은 감독들의 지도하에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 또한 2직분론은 칼빈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보는데, 에드워드 6세의 섭정 서머셋 경에게 쓴 편지에 종교개혁을 독려하였고, 그의 가르침이 영국에 소개되었다. 웬체스터의 필폿은 1554년 피의 메리에 의해 장로교 신앙을 고백한다는 이유로 사형 당하기도 했다. 칼빈의 교회 정치 사상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 영국에 토착화 되었다. 그의 필생의 역작이었던 기독교 강요가 토머스 노턴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면서 성경적 교회관이 영국에 소개되고 교회에서의 자율과 평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또한 칼빈의 설교집 역시 번역되어 그의 사상이 영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2직분 사상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 청교도에 의해 계승된 장로정치 사상 : 토마스 카트라이트에 의해 장로정치 사상이 구체적으로 제기 되었다. 그는 교회 정치 개혁을 촉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1) 대주교 부제의 이름들과 기능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2) 교회의 합법적인 목사직, 감독직 집사직은 사도적인 제도로 축소되어야 한다. 감독은 설교와 기도, 집사는 구제에 전무해야 한다.

3) 교회 행정은 감독이나 부제 등의 직원보다는 목사와 장로에 의해 통치되어야 한다.

4) 목사는 여러 교회가 아닌 하나의 지역교회를 목회해야한다

5) 목사는 감독의 임명이 아닌 회중에 의해 공개적으로 공평한 선거에 의해 피택되어야 한다........

 

카트라이트의 견해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당시 감독주의자인 영국교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장로정치의 형태를 고집하며 월터 트래버스와 함께 교회개혁을 계속했다. 이들의 책 [하나님 말씀에 묘사된 교회의 거룩한 권징] 에서 장로교 정치와 권징이 하나님이 주신 법인 성경에 근거 한다고 강조하며 영국교회에 세워갈 것을 주장하여, 결국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의해 영국 교회에 토착화 되었다. 장로교 최초의 교회는 와즈워스에 세워지고(1572), 장로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장로정치

청교도 운동은 제임스 1세의 통치 기간에 장로교를 중심으로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제임스 1세는 감독 없이 왕도 없다는 선언으로 감독주의를 지지하였고 로마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 물론 청교도들은 이에 맞서 의회를 장악하고, 그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들은 교회 개혁이 통치자를 통해 불가능함을 목도하고는 차선책으로 설교운동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교육기관을 통해(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 많은 설교자들을 배출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소집 :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1세는 상당히 사치스러운 인물이었다. 그의 친 천주교 성향과 폭정과 박해 가운데서도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행정 체제와 예배를 로마 천주교의 잔해로부터 개혁하여 성경적인 교리와 예배, 교회정부 형태를 회복하기 위한 자문을 구하는 회의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소집하여 [1643-1647] 총회는 의원의 상원의원 15명 하원의원 15명, 곳곳에서 모인 목사 120명으로 구성하여 1,100회 이상의 논의를 거쳐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작성하여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서, 소요리문답서, 공예배 지침서, 장로교정부형태론(1644) 등 장로교 신앙의 표준문서가 나오게 되었다.

 

장로교 정부 형태론 : 이듬해 1648년 의회는 [장로교 정부 형태론]을 영국교회의 정치 원리로 승인했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 행정을 위한 지침서로 채택했다. 장로교도들은 이것에 장로교정부형태론에 기초하여 장로교 공동 선언서를 (교회정치에 대한 신성한 권리) 작성하였다(1646). 1646년 영국 의회는 교구에서 장로를 선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장로교정부 형태론에서는 교회의 기초적인 행정 기관으로 공동의회를 두었고, 교회의 치리 기관으로 노회, 대회, 총회를 두었다. 목사를 돕는 직분으로 장로를 두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개혁주의 교회정치 체제를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인 예배 모범을 제시했다. 청교도들은 예배 개혁이 바로 교회 개혁의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공예배 지침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배 순서를 초대교회의 모형을 따라 단순화 시켰다. 그들은 예배의 원리로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 한 분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인간이 고안한 예배를 금하며,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하되 특별히 주일을 구별하여 예배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 모범이 되고 있다.

 

 

3. 근세의 영국 장로교회와 아일랜드 교회

 

* 왕정복고와 장로교 운동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지도적인 장로교 목사들을 궁정 목사로 임명하고 교회의 고위직에 등용하는 등 잠시나마 장로교도에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성공회 예배가 재도입되었고 주교들에게 교회와 성당을 혁신하는 업무가 부여되었다.

 

찰스 2세는 1660년 통일령을 내려 모든 청교도 목사들에게 3개월 안에 영국 국교회로 개종하든지 아니면 사직할 것을 요구하였다. 찰스는 1661년 자치제령을 공포하여 장로교도를 더욱 압박하였다. 비국교도들이 정부 기관에서 근무하는 것을 막았고 장로교도의 성공회 개종을 허용하였으나 성공회 교도가 장로교도로 개정하는 것을 금하였다. 1688년 장로교도들은 로마 천주교로 영국을 환원시키려던 제임스 2세를 명예혁명으로 몰아냄으로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장로교회는 내적. 외적인 도전을 받아 더욱 약화 되었다. 장로교회의 몰락을 초래한 또 다른 요인은 교회가 분열되면서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목사들이 목회 사역을 맡음으로 회중들이 목사를 신뢰하지 않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인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다수의 성도들이 아리우스주의와 단일신론에 빠져 좌경화되어 전통적인 장로교 신앙에서 멀여져 갔다

 

* 19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영국의 장로교회 회복을 위해 1836년 대회 조직을 후원하였으며 영국 장로교회는 1940년대에 이르러 7만 5천여명의 교인을 둔 교단으로 성장하였고 20세기 중반에는 개혁중의 신학을 고백하는 교회와 연합하여 19만명 이상의 교인을 거느리는 연합개혁교회를 이루었다

 

* 아일랜드 장로교회

아일랜드는 성패트릭에 의하여 복음화 되어 켈틱교회를 형성하였으나 1170년 로마천주교회의 영향권 아래 놓이면서 영국교회의 지배를 받았고 17세기 이후 아일랜든 장로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칼빈주의적인 장로교도들이 대부분 이주함으로 북아일랜드는 쉬벡 장로교회화 되었다.

 

1633년 캔터베리 대주교인 월리엄 로드가 성공회 정책을 전개하여 많은 장로교 목사를 면직, 추방함으로 아일랜드에서의 장로교운동은 한때 위기에 봉착하였으나 1642년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최초의 장로교 노회가 조직되었고 1660년대에는 10만명의 신자를 거느린 80여 개의 장로교회를 성장하였다.

아일랜드 당국은 영국이 왕권 옹호의 계약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항의단을 파송하기도 했다. 결국 아일랜드 장로교도들은 왕정복고에 앞장섰지만 찰스2세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여 수난을 겪었다.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1683년 미국에 이민한 스코틀랜드-아일랜드 계통의 이주자를 위해서 미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랜시스 미케미를 파송함으로 신대륙에서 새로운 장로교회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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