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파되는 십자가(고전 2:5-13)
바울의 결심, 오직 십자가만을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이를 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이전에 방문한 아덴에서의 설교 사역에 대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덴에서 그는 아주 유려한 문체로, 그리고 아덴 사람들의 경험과 현실을 접촉점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을 창조하셨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한 형제와 자매라고 하는 논리로써 아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를 원했었지만, 이런 그의 설교 사역은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몇 사람이 믿으러 나아오기도 했지만 아덴에 의미 있는 교회가 성립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바울은 고린도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에 이르는 동안 아덴에서 있었던 일들을 반성하면서 바울은 이제부터 자신의 말주변과 재능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그치겠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복음을 진지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선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고린도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십자가를 전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두 가지 방법 사이의 갈등
이러한 사도 바울의 경험 속에 있는 두 가지 경향, 하나는 전달기법, 즉 내가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전달의 기법을 연구하고 그 기법을 최대한 사용하는 방법과,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써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 이 두 가지 방법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함께 공존하고 있었고,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 해당하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의 기법을 잘 연구하고 이것을 습득하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령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만으로 해야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두 가지 방법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늘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주변에서 이미 이런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발전하는 현대의 프레젠테이션 기법
물론 우리는 그러한 충돌을 잘 의식하지 못한 채 이제까지 교회생활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일들은 흔히 경험하고 늘 접하는 문제들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사용하는 스크린의 경우, 우리 교회는 스크린에 설교자의 모습을 비추는 정도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최소한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대의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연구하고 습득한 사람들은 이 스크린을 다양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현대의 발전된 전달 기법 중에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기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들을 도표나 혹은 그림 같은 것들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전달할 내용들을 어떻게 잘 꾸미느냐에 따라서 설득력 있게 전달되느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기법이지요. 그래서 현대 기업에서는 이 프레젠테이션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취직하게 되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되는 능력 중 하나가 프레젠테이션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중 ’파워포인트(power point)'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컴퓨터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요. 왜 군대에서도 그런 것 있었잖습니까? 상부에서 검열이나 다른 무엇인가가 오면 행정병들은 죽어납니다. 몇날 며칠 밤을 세워 차트를 만들죠. 그래서 차트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차트병’이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하얀 전지를 큰 책상 위에 펼쳐놓고 거기에 그림도 그리고, 도표도 그리고, 매직으로 예쁘게 글씨도 쓰면서 차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차트병들은 그 일만 하면서 상대적으로 편안한 군대생활을 했던 거지요. 이렇게 군대에서 차트를 만들어 발표하는 이 일을 가리켜 ‘브리핑(briefing)’이라고 하는데, 이 브리핑이 바로 오늘날의 프레젠테이션이에요. 이렇게 프레젠테이션 기법을 사용하면 전달할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돈해서 전달할 수 있고, 또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프레젠테이션은 오늘날 영상기술이 발달하면서 이제 대중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사실 컴퓨터를 잘 쓰는 목사님들은 벌써 십 오륙 년 전부터 설교에 이와 같은 프레젠테이션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래서 설교자의 모습뿐만 아니라, 때로는 설교의 대지나 소지도 글자로 보여주고, 또 설교에 인용되는 성경구절, “성경 찾을 것 없이 앞만 보고 있으세요. 앞에 다 나옵니다.” 또 설교 시 설명을 요하는 단어들에 대한 설명들도 여기에 등장합니다. 지명이 등장하면 지도를 보여주고, 영화의 한 장면을 예화로 들면 영화의 장면까지 동영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등 이렇게 활용하는 것이지요.
생각하는 능력을 제한하는 영상 이미지
그렇다면 그런 방식을 통해 진리를 선포하면 사람들이 그 진리를 더 잘 받아들이는가? 영상에 대해서 크게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아마 가르침에 더욱 큰 효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식을 전달하는 면에서는 그것이 유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닙니다. 말씀 선포는 인격 속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영상을 통해서, 글씨와 그림과 도표와 동영상과 같은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의 영혼에, 그 인격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학자들 중에는 이런 현실들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최근 연구결과가 속속들이 발표가 되고 있는데, 만 2세 미만의 아이들에게는 TV를 전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주장도 있어요. 만 2세 미만의 아이들이 TV를 보면 정상적으로 지적인 성장을 못 한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TV 화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지겹다고 생각하기 전에 화면전환이 늘 이뤄지게 되는데 그 화면전환이 실상은 굉장히 빠르게 이뤄지고 있어요. 오늘 한 번 TV 보면서 확인해보세요. 장면 하나에 몇 초씩 비춰지고 있는지 한 번 보세요. 만약 10초 동안 똑같은 장면이 나오면 벌써 사람들은 지겨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전에 계속해서 바뀌게 되어 있어요. 보통 4초에서 8초 사이에 화면이 계속 바뀝니다. 그러니까 30분짜리 연속극 하나를 보는 중에도 장면은 수십 번 바뀌게 되는데, 세트 하나를 놓고 촬영해도 각도를 계속 바꿔나가면서 찍는 거예요. 10초 이상 한 화면을 보여주는 경우는 드라마가 끝날 때밖에 없어요. 가만히 한 번 살펴보세요. 드라마 끝나면 엔딩 화면이 뜨면서 이 드라마의 후원사라든지 혹은 출연했던 탤런트 이름들이 쭉 지나가는데 장면은 딱 멈추어 있는 거예요. 이때는 글자가 쭉 지나가니까 장면이 멈춰도 괜찮지, 글자가 멈춰있으면 장면이 멈춰있으면 안 돼요. 글자가 멈춰있으면 장면이 변해야 되고, 글자가 움직이고 있으면 장면이 멈춰있어야 하는 법칙들이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않고도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상의 기법인 거예요. 장면 전환이 4초에서 8초 사이에 계속 변하기 때문에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지극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즉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TV를 빨리 접한 아이들은 정상적인 사고력의 발달에 문제가 있고, 사고력 발달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 아이들은 폭력적인 심성을 많이 가지게 되는 거지요.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치받쳐 올라와서 경련을 일으키고 쓰러지는 아이들에 대한 보고가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전에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이 하나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은 ‘리모트 컨트롤(remote control)’입니다. ‘리모트 컨트롤’은 간단히 말씀드리면 ‘리모컨’입니다. 리모컨은 바로 이 리모트 컨트롤을 간단히 줄여서 만든 일본식 작명법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이 뭐냐 하면, 인간들이 TV를 만들어서 그 TV 화면으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보내는데, 사람들은 그 TV 화면의 채널을 돌리기 위해서 리모트컨트롤을 들고 계속 돌리는 거지요. 왜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TV 보다가 ‘어, 딴 데는 뭐하냐?’ 돌려보고, 돌려보고, 돌려보고, 돌려보고... 계속 돌립니다. 그리고 눈에 띄는 장면이 들어오면 멈춥니다. 그러다가 조금 싫증나면 또 돌리고, 돌리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때 우리는 리모트 컨트롤을 가지고 TV를 원격조종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학자는 그것은 오히려 TV가 사람들을 원격조종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TV에서 제공해주고 있는 영상과 그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미지와 같은 것들이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래서 TV에 나오는 과도한 폭력, 과도한 욕설과 저급한 행동들, 혹은 성적인 문란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보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의식을 형성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렇게 행동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사람이 TV를 조종하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실상은 TV에서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에 오히려 본인이 조종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설교는 생각의 작용을 극대화 시키는 것
‘영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념을 형성시키지 않습니다. 생각하게 만들어서 사람의 가치관을 만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사람의 인생관을 만들지 않습니다. 영상은 직관적으로 알게 하는 거예요. 생각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는 무엇이냐? 설교는 생각의 작용을 극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생각 없이 영상으로 들어올 수 없어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인격의 변화를 가져오는 생명력 있는 말씀인데 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생각 없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생각을 해 보라 이거죠.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번 그 말씀의 원칙에 비추어서 자신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보고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라 이겁니다. 생각의 과정이 있어야 되요. 생각의 과정이 없으면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하게 영화를 보고 TV 보는 것과 같은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내어놓고, 자기의 모든 가치관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 모든 것들을 점검을 해 보고, 그리고 깰 것은 깨뜨리고, 무너뜨려야 할 것은 무너뜨리고, 고칠 것은 고치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이게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생각이 없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과도하게 직관적으로 어떤 사실을 전달하는 기법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죽이는 행동이 되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으로 진리를 설명하려는 시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데 인간이 자기의 어떤 재능을 발휘해서 그 일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교회 안에 늘 존재하고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 중 아주 대표적인 것은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지요. 중세 스콜라 신학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이 이성의 탐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 진리를 인간의 이성으로써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전달하면 이 진리가 인간에게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몇 백 년 동안에 걸쳐서 영향을 미쳤던 거지요. 스콜라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시도했고, 그리고 증명된 하나님을 통해서 다른 모든 진리들이 그대로 다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기독교 변증학’이라고 하는 것이죠.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인데, 그 변증학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증주의적 변증학’이라고 하는 거죠. 이것은 증명을 통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나타내는 변증학입니다. 그런데 증명의 제일 처음 출발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 실증주의 변증학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면서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많은 양을 투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입니다. 다른 말로 말씀을 드리면 ‘유신논증(有神論證)’이라고 하는 거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방법, 이것이 유신논증이에요.
사실 하나님의 존재가 전제되면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있는 거죠. 신앙은 사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부터 출발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믿는 자리에 나가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계시로,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받아들여서 신앙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신앙과 삶의 모습들, 이것들이 우리의 신앙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죠. 하나님의 존재가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 더 깊은 심오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우리 학과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한 친구가 저한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 믿을 수 있냐? 그거 뭐 하나도 증명되지 못하는 것들인데 그런 거 뭐 아무 것도 아니다.” 뭐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친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야! 네가 한 가지 사실만 인정하면 나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을 100% 증명할 수 있다!” 그랬더니 깜짝 놀라요. “자,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정확하고 가장 과학적인 학문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이 친구가 수학이라고 답변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질문을 했어요. “그래? 그러면 그 수학이 실상 처음 출발은 증명 없이 출발하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랬더니 이 친구가 고개를 갸웃거려요. 수학의 처음 출발에는 증명이 없어요. 그 출발선에는 증명 없이 자명하다고 인정하는 진리가 있는 거죠. 그걸 가리켜서 ‘공리(公理)’라고 불려요. 그 공리를 증명 없이 자명하다 그렇게 인정하는 거죠. 그런데 제가 생각을 해 봤어요. ‘점(點)’은 공리로써 정의내릴 때에는 크기는 없이 위치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죠. 그러나 우리의 실제 경험 속에서는 위치만 가지고 있는 점은 자명한 진리가 아니에요. 점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얼굴의 점이 커지면 걱정이 많아지고. 그렇죠? 예, 점에는 크기가 있지 어떻게 크기가 없어요? 이건 자명하지 않다는 거죠. 그러나 수학에서는 크기가 없이 위치만 있다고 일단 전제를 해야 수학의 모든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선(線)’도 마찬가지죠. 선은 점이 옮겨간 자취예요. 따라서 선에는 굵기가 없죠. 그런데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그것이 맞지 않습니다. 저도 학생 시절에 제도를 조금 경험한 적이 있는데, 연필 깎아서 몇 밀리 선을 그어라 그러면 몇 밀리 선을 그어야 되요. 자를 갖다 놓고 연필로 선을 긋는데 0.2mm 선도 긋고, 0.4mm 선도 긋고, 0.6mm, 1mm짜리, 2mm짜리 선을 그어요. 두께가 다르다 그 얘기죠. 그러나 수학에서 선은 두께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친구한테 얘기를 했어요. “자, 봐라. 수학이란 처음 출발에서는 증명 없이 자명하다고 인정하는 진리로부터 출발하는데, 증명 없이 자명하다고 인정하는 그 진리들은 실상 우리의 실생활 속의 경험 속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점을 봐도 그렇고 선을 봐도 그렇다. 이것을 우리가 자명한 진리로 인정할 수가 없지 않느냐? 실생활 속의 우리 경험과 그렇게 차이나지만, 그러나 인정해야 수학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리가 인정되어야 수학의 모든 것들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진리도 한 가지, 한 가지만 인정하면 100% 증명이 된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입이 떡 벌어져서 말을 못해요. 주변에 듣고 있던 다른 친구들이 “야, 네가 졌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요. 이 친구가 졌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안 믿지요. 그런 식으로 친구랑 말싸움해서 이겼는데 그 친구가 예수님 믿고 돌아온 경험을 하신 분이 계십니까? 뭐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이 때 어떤 경험을 합니까? “야, 역시 예수쟁이는 말 잘해.” 그 말 듣는 거예요. “예수쟁이는 말 잘해. 야, 너 교회 나가더니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하냐? 너희 목사님한테 배웠냐?” 그런다고요. “야, 교회 가면 목사님한테 배우는데 말은 기가 막히게 잘 한다,” 이거에요. 그러면서 ‘교회 가서 목사님한테 배워서 말은 잘 하지만, 저게 진짜는 아니야.’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거죠. ‘내가 새롭게 배워서 너의 콧대를 납작하게 한 번 눌러보겠다. 기다려라.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조금 더 다른 논리를 개발해올게.’ 그런 반응을 보이지요. 저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학생 시절에 아이들하고 논쟁을 하면서 말싸움을 해서 꼼짝 못 하게 눌러주는 것,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런데 그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꼼짝 못 하게 눌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게 아니고, 꼼짝 못하게 눌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에 다짐을 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이제부터는 논쟁을 하지 않겠다. 내가 이제부터는 말싸움을 하지 않겠다. 내가 이제부터는 사람을 말로 어떻게 해서든지 눌러보려고 하지 않겠다.’ 눌러본들 그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어떻게 잘 하느냐, 논리적으로 어떻게 잘 꾸미느냐, 이렇게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의 마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논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죠.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지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된다!”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그 마음 속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게 아니다 그 얘기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십자가
과거에 ‘인생들은 진리를 알 수 있고 진리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은 일정부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셨을 때 그 형상의 한 부분이거든요. 문제는 뭐냐 하면 인간이 타락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가지고 있던 지식은 심각하게 부족한 지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지요. 또한 인간의 죄악과 인간의 구원에 대한 것들은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 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을 가지고 탐구하면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느냐 하면, ‘어쨌든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 있는데, 이 분은 권능이 무한하고 그 지혜와 그 능력에 있어서 무한한 분이다.’ 뭐 이런 정도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신을 탐구하면 이렇게 능력이 무한한 신은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알아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 신이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든지, 그 신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든지 하는 사실들은 실상 인간의 이성의 탐구를 통해서 알 수 없는 것들이에요. 더군다나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길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장 9절 말씀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사람의 무엇으로도? 마음으로도... 여기서 ‘사람의 마음’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인간의 지성을 말하는 것이에요. 인간의 지성, 즉 인간의 이성으로도 알지 못하였는데, 무엇에 대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비밀, 구원의 복음, 이것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천재들이 모여서 연구를 해도 알 수 없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요. 다시 말씀을 드리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 사건이죠. 죄인들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죗값을 지고 매어 달렸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던 대로 죗값을 치르셨고, 그래서 죄인이었던 나는 직접 죗값을 치른 적이 없음에도 이 사실을 믿음으로 죄 용서를 얻고 생명을 얻게 되는 사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더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 당시에, 창조함 받은 그 당시의 이성을 가지고 아무리 연구를 해도 이 구원의 비밀은 알 수 없는 거예요. 심지어 천사들조차도 이 구원의 비밀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보면 천사들도 이것을 알기 위해서 탐구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사들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지요. 피조물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밀인 십자가를 전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논리로, 인간이 자기의 재능으로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것을 납득시키고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받아 그 영혼이 변화되게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재능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알게 하고 믿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
애초에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다면, 믿게 하는 것도 인간의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말씀의 효력은 설교자의 재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효력은 설교자가 터득한 전달기법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잘 배우고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일정부분 유익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영혼이 변화되고 새 생명이 되는 일은 그것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설교에 있어서 십자가가 그 메시지의 중심이라고 하는 사실과 십자가가 중심이 된 설교에 있어서는 오로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이 메시지를 영혼들에게 전달하고 영혼들에게 깨우치고 영혼들을 감화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생각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교역자를 볼 때 그 교역자가 가지고 있는 재능들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가진 학식에 주목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수사법 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의 역사에 우리의 마음을 맞춰야 하는 것이지요. 초점이 어디에 주어져야 합니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의 영혼 속에 말씀을 밝은 빛으로 드러내게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지혜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들에게 이 말씀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을 ‘영감’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영감이에요. 또한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 말고 성경을 읽고 말씀의 선포를 듣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조명’이라고 부릅니다. 영감과 조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 우리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하여 마음을 기울여야 됩니다. 그리고 성령에게 의존해야 되요.
성령과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과 진리가 우리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 성령께 달려 있으므로 성령의 그 역사 속에 있기 위해서는 성령과의 관계가 바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필요하지요. 자녀들 중에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성도들 중에서도 나타납니다. 찬송 부를 때는, “예수 사랑해요~” 그렇게 찬송을 불러요. 눈물도 착 흘려요. 그런데 말씀에 순종은 안 해요. “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런데 순종은 안 합니다. 아이가 “엄마 사랑합니다.”하는데, 엄마가 그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야, 이 재활용품 좀 버리고 와라.” 그러면 “싫어요! 바빠요! 공부해야 되요! 영어단어 외어야 되요!” 그러면서 안 갑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또 “엄마 사랑해요!” 말끝마다 그래요. 그러면 엄마가 볼 때 이 아이가 정상으로 보일까요? 아니죠. 정상이 아니죠. 안 그래요? 우리는 왜 진리의 역사를 체험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진리로 말미암아 은혜를 주신다고 하셨는데 왜 그 말할 수 없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다 그 아이처럼 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사랑해요” 하고서는 그 다음에는 불순종! 다 잊어버리는 거예요. 대답은 예, 예 하면서 순종하지 않을 때 얼마나 약 오르는지 알아요? “OO해.” 그러면 “예,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면 안 했습니다. 또 “야, 뭐 해라...” 그랬는데 대답은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까 또 안 했습니다. 그러면 어때요? 화가 나죠. 속에서 화가 나죠.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빚 받을 게 있는데, 가서 말하면 언제든지 “예, 알겠습니다. 꼭 갚아야죠. 예, 줍니다. 예, 알겠습니다. 뭐 며칠까지 꼭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날 되면 없어져서 이 사람이 안 나타나요. 그래서 그 다음에 또 찾아가서 기껏 얘기하면 대답은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줘야죠. 언제까지 틀림없습니다. 이번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랬는데 그 날 되면 또 전화도 안 받고 없어져요. 이렇게 몇 번 반복해보세요. 정말 짜증나고 화가 나고 그러죠? 그런 경험을 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도 없다
순종이란 무엇인가?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순종하기로 결심했었던 것이 순종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결심까지는 쉽게 갑니다. 그러나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대답만 잘 하고 안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초에 대답도 안 합니다. 그런데 대답은 잘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그렇게 찬송을 불러요. 한데 그의 찬송과 삶이 일치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음 속에 소원을 간직합니다. “목사님, 내가 말씀에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순종하십니까? 자기가 기대를 갖고 있고 소원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대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과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서 다스릴 때 그 다스리심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리심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없이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은혜 받겠다고 덤비는 일은 사실 올바른 기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설교의 전달, 그리고 설교를 통해서 진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역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는 모든 과정에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행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없이 무슨 말재주를 통해서, 무슨 기법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해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과 바른 관계 속에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말씀의 은혜가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하신 것들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성령께서 기쁨으로 역사하시겠습니까? 말씀에 은혜가 없고 삶에 생명의 능력이 없는 이유는 성령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 한 번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삶을 깊이 생각하시고 성령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생명력으로 충만하며 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자리에 이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익 힘 문 제
1. 지난주에 배운 말씀을 삶 가운데 어떻게 묵상(적용)하며 살았는지 이야기해 봅시다.
2. 복음 전파의 방법에 있어서 교회 역사 속에서 늘 공존하면서 충돌해 왔던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3. 설교가 왜 중요한지 하나님의 계시와 생각의 작용과 관련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4. 개신교에도 영향을 미쳤던 중세의 ‘스콜라 신학’이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5.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알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엇이며, 왜 알 수 없는지 말해봅시다.
6. 우리가 성령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성령과의 바른 관계란 결국 무엇을 말합니까?
7. 말씀을 듣고 깨닫고 은혜 받은 내용을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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