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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주기도문] 마 6:12절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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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2절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마 6:12과 눅 11:4 사이에 표현상 차이가 있음을 본다. 마태복음에서는 죄를 채무라는 뜻의 용어 (opeilemata: 하지만 아람어에서는 죄 [hoba]를 부채로 표현한다)를 사용하지만, 누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죄를 가리킬 때 죄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의 용어 (hamartiai)를 사용한다. 하지만 누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를 가리킬 때는 채무의 의미로 (opeilo) 사용한다.

 

마태복음의 간구는 “우리가 우리들의 채무자들을 이미 용서한 것 같이 (hos= as와 과거완료형) 우리의 채무를 용서하여 주소서”로 번역된다. 누가복음의 간구는 “우리 자신들이 우리에게 채무진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현재형)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런 용어의 차이점은 유대인 독자와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둔 표현상의 차이일 뿐 의미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기도를 해석하는 열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우리가 용서를 받기 위해서 우리가 그 조건으로 먼저 타인을 용서해 주어야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타인을 자연스럽게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예수님 당시의 불신 유대인들은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타인을 용서하는 일이 조건으로 그리고 공로로 선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락 (Sirach) 28:2에서 “너희 이웃의 불의를 용서해 주어라. 그런 다음에 네가 기도할 때에 너희 자신의 죄가 용서받게 될 것이다.” Mishnah Taanit 16에서는 “우주의 주재자시여, 만일 당신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우리 또한 우리의 동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니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가르치시는 기도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조건이나 공로를 필요로 한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이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은 매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함을 알 수 있다. 매일 죄를 범하기에 사죄의 은총도 항상 필요하다. 우리가 남을 용서했기에 그 조건을 기억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의 죄 용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마 18:21-35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 (약 50조- 이것은 도무지 노력으로는 갚거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요 죄이다)을 왕은 불러서 (수동형: 왕이 주도권을 가지고 탕감 작업에 돌입했음을 의미함) 완전히 탕감해 주었지만, 그 탕감 받은 사람은 일백 데나리온 (약 500만원)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일만 달란트 빚졌던 자를 투옥시켜 버렸다. 왕의 용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자신의 용서의 삶으로 표출되었어야 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큰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의 삶은 변화되어야만 했다. 성도의 변화된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증명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죄를 진정으로 받지 못한 사람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는 불가분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남을 용서해 준 만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공로적-조건적으로 생각하지 말라.

 

현실적인 적용을 위해 하나 더 생각해 보자. 형제 자매의 과거의 죄를 다시 상기시켜 정죄하는 일은 마귀적인 일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사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정죄하면서 악용하는 것은 교회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죄의 은혜를 진실로 알지 못한 처사이며, 사랑과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는 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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