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학과 성경자료

[주기도문] 마 6장 10절 중하반 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반응형

마 6장 10절 중하반 절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제 우리는 주기도문 중에서 3번째 간구를 살펴볼 차례이다. 눅 11장에는 이 간구가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는 아마 누가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간구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간구가 실제적으로 중복되어 포함되어 있거나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간구는 독립적인 기도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이루어지이다’ (geneitheito)는 아오리스트, 수동태 명령법인데 이것 역시 이전 간구에서 사용된 동사처럼 신적 수동태로 보이기에 행위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자 예수님으로 보인다. 사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으로 이루어진 것을 교회를 통해서 성령께서 계속해서 이루시길 원하는 종말론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주기도문 전체는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종합적으로 요청한다)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성령 하나님을 그 자신의 존재 양식의 주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오순절의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 자신의 하나의 오심 (a parousia)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오순절 성령님 사이의 일치는 본체의 일치 혹은 위격의 일치가 아니고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일치이다. 환언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교회의 설립과 성장, 복음 전파, 중생과 성화의 사역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사역을 이루기 위해 일체가 되신다. 따라서 주님의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 혹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승천하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사역인 동시에 오순절에 인하신 성령님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의 많은 부분 특히 승천하신 이후의 사건은 기독론적, 성령론적, 교회론적,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동시에 연결되어 등장하는 해석의 원칙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우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며 지금의 천상의 사역 역시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성취하고 계시는 것이다. 요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비슷하게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참고. 히 10:7, 9).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은 성자를 통해 잃은 자를 찾는 일이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 마 18:12-13; 눅 15:3-6). 마 18:14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은 흥미롭게도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당시 가장 인간 대접 받지 못했던 천민들인 창기, 세리와 같이 바리새인들에 의해 죄인들로 낙인 찍힌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설명하는데 적합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도 받게 되었다 (마 11:19).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이런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막 2:17).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런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욱 더 하나님 나라에 근접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 21:31). 이것은 사 61:1-2과 겔 34:15-16의 예언의 성취인데, 예수님은 실로 가난한 자, 잃어버린 자, 상한 자, 병든 자를 구하러 오신 분이셨다 (눅 4:21). 물론 이 구절들을 영적인 의미로 볼 수도 있겠으나 물질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를 배제하지 않음도 기억할 만 하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의 성취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분리할 수 없다. 막 14:36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 (뜻)대로 하옵소서” (눅 22:42).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것이었다 (갈 1:4; 히 10:9-10). 즉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구속사의 경륜을 이루시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죄와 사탄의 세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것인데, 구속 곧 죄 사함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 (골 1:13-14; 사 53:10-11)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일차적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았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구원 사역 속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위의 신적 수동태를 기억하라), 이 간구와 이 간구를 해야만 하는 신약교회는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어 버린 이 간구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하늘은 사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계 12:9). 이제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땅은 하나님과 사탄의 격전지인데, 교회의 승리의 원천은 성령의 권능을 입는 것인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으로 이루신 승리를 믿고 담대히 행하는 것이다. 마치 하늘의 승리는 지상의 승리를 비추는 것과 같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정적인 과거의 승리는 지상 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승리를 이미 결정해 버린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땅 위에는 여전히 사탄의 세력이 힘있게 활동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경계해야 한다 (엡 6:12).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는 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놀이-게임이 아니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만 하는 전투이다 (히 12:4).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구원사역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겠다. 우리 인생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향방이 달라지고 승패가 갈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삶 속에서 찾고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 말씀에 기초한 기도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자신의 인간적인 야망을 이루도록 강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고 경청하려는 자세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망과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품은 소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따라서 이 점검 부분을 위해 성령님께 간구하여 점검하도록 해야 한다. 그 후 우리는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략적으로 체계적으로 시간과 물질의 청지기로서 비전을 현실화 시키도록 최선의 삶을 경주해야 한다. 이 경주 속에서 평안과 보람, 그리고 기쁨을 누린다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찾고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루는 과정도 우리의 충성을 도구로 한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는 것임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힘들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의 삶을 순종적으로 살고자 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하늘로부터 수직적으로 입고 싸우는 이런 영적 전투와 더불어, 신약 교회는 예수님의 삶에서 본받아야 할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수평적인 사랑의 실천은 수직적인 구원을 선포하기 위한 차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인본주의적인 간구와 나의 뜻을 접어주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순종의 마음이 더욱 요청되는 시대이다. 아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