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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성경자료

바울의 이신칭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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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이신칭의 이해

(고신대 송영목 교수님 글입니다.)

 

 

바울의 이신칭의 (以信稱義) 교리는 개신교와 카토릭을 분리해 놓았다. 특별히 루터교회에 있어서 이신칭의는 하나의 교리라기보다 기독교에 대한 전체 이해를 결정하는 교리이다. 이신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원적 죽음에 근거하여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들에게 의의 선물을 주시거나,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하나의 법정적인 행동 (judicial action)이다. 우리는 '법정적인 '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의 창조적인 집행을 본다. 그리고 법정적인 의는 단지 죄인을 향해서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이며 의로운 삶까지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의롭게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 의이다 (고후 5:17). 같은 은사는 믿음으로만 받을 있다. 카토릭이 주장하듯이 인간의 노력과 은혜가 협력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의의 선물은 받은 은혜와 일치하는 새로운 삶을 요청한다. 카토릭 진영에서는 이신칭의를 바울의 교리 핵심적인 사항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실존을 묘사하는 여러 은유 가운데 하나로 본다. 헬라와 같은 세속적인 개념에서 의는 전가되거나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확립된 규범이나 인정된 정의의 이상과 일치할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 안에서만 의롭다고 말씀하신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의로우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일치하면 언약과 일치하는 삶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구약에서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며 구원의 행동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인간이 죄인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의로운 자로 발견되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올바르고 의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 (dikaiosune)라는 말은 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자주 등장한다.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유대인 성도 유대주의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했는데 율법과 할례를 강조했다. 이것은 사실 바울의 사도권과 복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기에, 바울은 논쟁적인 응답을 제시해야 했다 (보스, 1998:517).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충족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바울이 거짓 선생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2:19-21절에 의하면 칭의는 율법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데 칭의라는 자체가 갈라디아서에 강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라는 표현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서에서 발견되는 칭의와 관련된 모든 요소들은 갈라디아서에도 나타난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전형적인 특징은 율법보다는 믿음에 대한 강조이다. 로마서에서는 이신칭의를 다루는 본문이 많다 ( 1:17; 3:21-26; 9:30-33; 10:1-13). 1:16-17절은 로마서의 핵심 구절로 여겨져 왔는데, 구절 안의 '하나님의 '라는 용어는 구원의 능력이며 또한 유대인과 헬라인에게도 의미를 지니고 있는 복음과 관련되어 있음을 있다. 3:21-26절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관계없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속죄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를 세우셨으며, 이것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결과이다. 5-8장에서는 칭의가 직접적으로 자주 언급되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죄의 지배력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성도는 그리스도와 은혜의 능력 안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율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새로운 질서 속에 살게 된다 ( 8:1-17). 9-1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의를 찾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유대인들을 비판한다. 12-16장에서 이신칭의 주제는 14:17절에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로마서에서 율법은 갈라디아서에서처럼 단순히 몽학선생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율법은 거룩하며 선한 하나님의 뜻으로 나타난다.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아담의 죄성을 타고 탐욕으로 살고 있는 육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율법이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결과 죄와 율법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사람은 죄와 율법에 대한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 칭의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사역인데, 이제 율법과 죄로 특징지어지는 세대는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발생한다. 의롭게 자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그리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기대하면서 즐거워한다 (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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